[팀장 칼럼] ‘을의 싸움’ 된 항우연 사태… 누가 이들을 링으로 내몰았나
윤석열 대통령의 우주 사랑이 대단하다고 한다. 실제로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여러 차례 우주와 관련된 현장 행보에 나섰다. 지난 7월에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에 직접 커피차를 보내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의 성공을 축하했고, 11월에는 미래 우주경제 로드맵 선포식에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우주항공청을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본따서 만들라고 지시한 것도 윤 대통령이라고 한다.
윤 대통령의 관심 속에 우주 개발에 힘이 실리고 있다. 올해 한국 우주산업은 누리호와 달 궤도선 다누리의 성공으로 그 어느 때보다 분위기가 좋다. 정부는 2032년 달 착륙, 2045년 화성 착륙이라는 장기 비전을 발표하며 우주 개발에 대한 투자 확대를 약속했다.
국내에서 우주 분야는 비주류에 속했다. 당장 먹을거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찬밥 신세일 때가 많았다. 모처럼 우주 분야에 훈풍이 불고 있지만, 정작 연구 현장은 칼바람이 쌩쌩이다. 항우연의 조직 개편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없다.
이상률 항우연 원장과 고정환 한국형발사체개발사업본부장은 조직 개편에 대해 정반대 입장을 보이며 충돌했다. 이 원장이 차세대 발사체개발사업과 누리호 고도화 사업을 동시에 진행하기 위해 매트릭스 구조로의 개편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고 본부장은 본부-부-팀의 횡적인 수직 체계를 중심으로 차세대 발사체개발사업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맞섰다.
표면적으로는 조직 개편을 놓고 충돌했지만, 항우연 내부에서 사실상 독립적으로 움직여온 발사체 조직을 이 원장이 건드리면서 양측의 오랜 갈등의 골이 폭발한 셈이다. 주무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뒷짐을 지면서 양측은 심판 없는 링 위에서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한 치의 양보 없는 싸움 같지만, 사실 한 발 떨어져서 보면 항우연 내부 갈등은 ‘을의 싸움’에 불과하다. 항우연과 발사체 조직이 올해 많은 박수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실상 지난 십수 년은 계속되는 실패 속에 계란으로 바위치는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실패에는 징계와 감사가 뒤따랐다. 지금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박수 갈채가 언제든 비판과 비난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이들은 잘 안다.
이미 그런 조짐들은 있다. 윤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던 우주경제 로드맵 선포식에 고 본부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누리호 개발이 끝났으니 이제 고 본부장의 자리는 없다는 건지. 몇몇 연구자 사이에선 토사구팽이라는 격한 말까지 나왔다.
항우연의 연구 현장을 책임지는 평연구원들이라고 다를 건 없다. 조직 개편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될 때도 항우연 평연구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수권 증액 여부였다. 공공기관인 항우연의 임금총액을 결정하는 수권 증액이 이뤄지지 않으면 항우연 연구원들의 처우 개선도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항우연 신입사원 초임은 3800만원으로 과기출연연 24곳 중 21위에 머문다. 국내 최고의 항공우주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하다.
항우연 달탐사사업단 연구원들은 일하고도 받지 못한 연구수당을 달라는 소송까지 하고 있다. 1심에서 이겼는데 과기정통부와 항우연은 항소했다. 연구원 한 명 당 겨우 수백 만원이다. 과기정통부는 다른 공공기관의 수당 체계와도 연관이 있어 소송이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그러는 동안 연구원들의 꺾인 자존감은 누가 챙길지 궁금하다.
매트릭스가 나은지, 팀제가 나은지, 이런 것들은 당장 판단하기 힘들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소통과 조율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주무부처가 남 이야기하듯 뒤로 물러서서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면 ‘을의 싸움’은 끝날 수가 없다. 서로 상처투성이가 된 채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질 뿐이다.
NASA 조직도도 알고 있을 정도로 우주를 사랑한다는 윤 대통령은 이런 상황을 알까. 정말 우주를 사랑한다면 윤 대통령이 기억해야 할 건 이상률, 고정환 같은 이름이다. 맨땅에서 우주로 향하는 발사체와 위성을 만들어낸 연구자들이다. 이들을 링으로 내몰고는 모르는 척 뒷짐을 지는 이들은 누군가. 현장의 연구자 없이는 2032년 달 착륙도, 2045년 화성 착륙도 허망한 말 장난일 뿐이다.
[이종현 과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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