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의 연출가 이순재…미래가 좌절당한 ‘갈매기’의 시대 그렸다

임석규 2022. 12. 22.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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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여든여덟, '미수(米壽)'를 맞는 배우 이순재.

구순을 목전에 둔 이 노배우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 를 색깔 있게 연출한다.

"첫 공연을 희극으로 해석해 망했어요. 2년 뒤에 사실주의 연기의 창시자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솔하게 해석해 성공했지요." '연출가 이순재'가 배우들에게 꾸밈도, 과장도 없는 사실적 연기를 주문한 데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이순재표 연극 갈매기'에선 영화, 드라마 등에서 낯익은 유명 배우들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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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을 바라보는 배우 이순재(오른쪽)가 연기 인생 66년 만에 처음 연출을 맡은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의 한 장면. 배우 진지희(왼쪽)도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연극 무대에 오른다. 아크컴퍼니 제공

새해가 되면 여든여덟, ‘미수(米壽)’를 맞는 배우 이순재. 구순을 목전에 둔 이 노배우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를 색깔 있게 연출한다. 연기 인생 66년 만의 첫 연출이다. 체호프의 희곡을 연출하는 게 그의 ‘버킷 리스트(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 가운데 하나였다고 했다.

지난 20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 무대. 출연 배우들과 함께 기자들을 만난 이순재의 목소리엔 윤기가 여전했다.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에도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 연극의 교본이에요. 배우들이 꾸밈과 과장 없이 사실적으로 연기해야 작가의 철학과 사상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어요.” 그는 “연극을 ‘배우의 예술’이라고 하지 않느냐. 우선 배우가 (돋보이게) 살아나야 한다”며 “이번 작품은 우리 배우들이 정말 최선을 다해 연습했다”고 강조했다. 이순재는 이 작품에서 대지주 소린 역을 맡아 연기도 선보인다.

연극은 작가 지망생 트레플레프와 배우를 꿈꾸는 니나의 비극적 사랑 얘기를 주축으로 흘러간다. 여자 넷과 남자 여섯이 가리키는 ‘사랑의 화살표’가 복잡하게 얽히는데,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파동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연기 전공생이라면 누구나 접하는 작품으로 , 여러 명대사로 무수히 무대에 올려진 걸작이다. 체호프가 36살 때 쓴 이 희곡의 첫 공연(1896년)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순재는 “이 작품은 희극이 아니라 비극”이라고 강조했다. “첫 공연을 희극으로 해석해 망했어요. 2년 뒤에 사실주의 연기의 창시자 스타니슬랍스키가 진솔하게 해석해 성공했지요.” ‘연출가 이순재’가 배우들에게 꾸밈도, 과장도 없는 사실적 연기를 주문한 데엔 이런 배경이 깔려 있다.

‘이순재표 연극 갈매기’엔 영화, 드라마에서 낯익은 배우들이 출연한다. 왼쪽부터 배우 이계구, 오만석, 소유진, 이윤건, 김나영, 고수희. 아크컴퍼니 제공

원작자 체호프는 이 작품을 ‘사랑과 예술에 관한 이야기’라고 했다. 이순재는 줄거리의 저변에 깔린 사상적 배경에 더욱 주목한다. “당시 체제에선 젊은이의 미래가 없으니 바꿔야 한다고 설파하는 작품이에요. 체호프가 서민, 빈민층에 대한 연민 속에 귀족사회의 붕괴와 개혁을 주장한 작품인데, 당시 시대상을 여실히 반영해서 사상적 배경이 깊지요.” 그는 “군사정권 시절엔 이념적으로 오해받을까 봐 이 작품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며 “이번엔 원작에 담긴 체호프의 정신을 그대로 구현할 것"이라고 말했다. 작품 속의 갈매기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도 이 연극을 보는 관전 포인트 중 하나. 이순재는 갈매기를 기성세대에 의해 꿈이 좌절당한 젊은이로 그린다. “ 작품 속 자유롭게 날지 못하고 총에 맞아 죽은 갈매기처럼,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체제 밑에서 젊은이들의 원대하고 아름다운 꿈도 좌절됩니다. 이런 체제 밑에선 젊은이의 미래는 없다고 비판한 체호프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하려 합니다."

연극 <갈매기> 연출을 맡은 배우 이순재는 이 작품에서 대지주 소린 역으로도 출연해 직접 연기도 한다. 아크컴퍼니 제공

'이순재표 연극 갈매기'에선 영화, 드라마 등에서 낯익은 유명 배우들을 만날 수 있다. 이항나, 소유진, 오만석, 김수로, 주호성, 강성진, 진지희, 이경실, 고수희 등이다. 18년 전 주인공 트레플레프 역으로 무대에 올랐던 오만석이 이번엔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성공한 작가 트리고린 역을 맡았다. 이순재와 함께 대지주 소린 역에 더블캐스팅 된 배우 주호성은 "이순재 선배가 일일이 배우들의 연기를 지적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연기해선 안 된다’는 부분은 바로잡아준다”며 “이순재 선배의 명예에 누가 되지 말자는 말을 하며 배우들이 열심히 단합해 연습했다"고 전했다. 김수로는 “살면서 이 연극을 20회 정도 봤는데, 그때마다 ‘나는 언제 저런 배우가 될까’ 생각했던 작품”이라고 했다. 연극 무대에 처음 오르는 진지희는 비중이 큰 니나 역을 맡았다. 공연은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내년 2월5일까지 이어진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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