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쾌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은 재판, 법정 밖에 '좋은 답' 있을수도
법정 풍경은 대체로 지루하다. 검찰 수사는 역동적이고 흥미진진하지만 법원의 시간은 느리게 흐르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 12시간 이상 법정에서 재판을 보고 쓴 기사는 검찰이 어떤 수사를 시작했다거나 누군가 구속됐다는 기사 아래 쉽게 묻힌다. 법조 기자라고 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사람 역시 검찰 출입 기자다.
그러나 실제로 진실과 정의를 찾는 일은 법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수사 단계에서는 한마디 듣기 어려웠던 말들이 ‘변론’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지는 곳이 바로 법정이다. 책 <법정 B컷>은 그런 점에서 법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어떻게 하면 더 잘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된, CBS 법조팀 기자들의 도전적인 글이다.
이 책은 지난 2020년 5월 시작된 동명의 기획을 바탕으로 한다. 2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연재물이 이어지고 있지만, 올해 8월을 기준으로 주요 꼭지들을 한 차례 정리해 책으로 엮었다. 김중호 법조팀장과 정다운·김재완 기자는 하루 종일 방청석에 앉아 변호인과 판사, 검사의 공방전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나 감상, 수년간 끝나지 않는 재판을 따라다니며 새롭게 알게 된 진실의 단면을 마치 단막극처럼 이 책에 담았다.
다만 현실 재판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명쾌하지도 완전하지도 않았다. 책 역시 법이 정의실현과 꼭 동의어는 아니라는 점을 여러 재판을 통해 말해준다. 예를 들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은 부장검사 시절이던 2000년부터 약 10년에 걸쳐 사업가들에게 돈과 향응을 받았지만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이 없다며 최종적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잘못은 있으나 법적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 책임자들이었던, 해양경찰청 지휘부에 대한 1심 판결 역시 마찬가지다. 재판부는 지휘부의 무책임과 무능을 처벌하기엔 특수한 사정이 많았다며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저자는 “인간의 모든 시스템이 그렇듯 형사재판 역시 완전하지 않다”며 “무죄는 무결하다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의 죄 있음을 법의 언어로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에 불과하다. 형사 절차란 생각보다 아주 편협하고 무력하다”고 서술했다.
책은 힘 있고 돈 많은 자들의 법정 공방 속, 소외된 피해자들에 대한 안타까운 시선도 드러낸다. 지난 2018년, 6개 시중은행에서 발생한 조직적인 채용비리 사건 이후, 당시 인사팀 실무자들과 채용의 총 책임자였던 은행장들은 사퇴하거나 문책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승장구하며 자리를 지켰다. 양심을 지키기보다 회사에 협조한 관계자들이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을 하게 된 셈이었다. 반면 채용 과정에서 ‘광탈’한 지원자들은 탈락 이유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의 입시비리 의혹 재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재판을 오가는 증인들을 보며 저자는 진짜 피해자는 이 증인들이라 생각했다. “조 전 장관 자녀의 스펙을 위해 자신의 성과임에도 힘없이 이름을 내주고 이후 검찰 수사까지 받아야 했던 학생들” 말이다.
책은 올해 8월 기준, 12년 5개월 동안 1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황당한 사례도 소개한다. 대검찰청 정문 앞이나 서울중앙지검 서문 앞 등에서 확성기를 매달고 ‘음향폭력’ 시위를 했다가 기소된 이들에 대한 재판인데, 피고인 4명이 돌아가며 무려 10차례에 걸쳐 재판부 기피 신청 등을 해 공판이 늘어졌다. 저자는 “매우 경직되고 융통성 없어 보이는 사법절차라는 것이 의외로 빈틈이 많고 얼마든지 희한한 모양으로 진행되기도 한다는 점을 보여드리고 싶었다”며 “재판에서 ‘을’의 위치인 피고인이 이렇게 사법절차를 이용할 수 있다면 ‘갑’인 판사와 검사는 더 자신의 입맛대로 할 수 있다는 말도 되지 않을까”라고 적었다.
실제 법관은 견제와 감시의 사각지대에 있는 존재다. 책은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에 대한 재판을 그 예로 든다. 사건의 피해자인 A씨는 자신의 이름 외에는 한글을 읽지 못하고 주민등록번호 전체를 외우지도 못하는 지적장애 2급이었다. A씨는 약 13년간 무임금으로 착취당했는데, 형사소송이 진행 중이던 때 가해자가 A씨를 찾아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인쇄된 문서에 지장을 찍게 했다. 당연히 이 문서는 그 진위여부를 엄밀히 따져야 했지만 재판부는 아무 검증 없이 3일 만에 공소 기각 선고를 내렸다. 다른 염전노예 피해자들이 쓴 처벌불원서는 거의 인정하지 않은 재판부가 유독 해당 법원 출신 변호사가 변호인이었던 이 사건에서만 부실한 판단을 했다. ‘전관예우’였는지, 일반인들이 진상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저자는 작량감경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판사 마음대로 법정형 하한의 절반을 깎을 수 있는 작량감경 제도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파격적인 제도지만 판사는 형을 감량할 때 그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고, 이 제도가 올바르게 시행되는지 감독하는 시스템도 전무하다. “2019년 1년간 작량감경 적용으로 깎인 형량은 총 630.5년이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연계될 때다. (중략) 70년 가까이 방치되어 온 작량감경 제도의 정비가 시급하다.”
이 책이 누군가의 편을 들지는 않는다. 그저 법정 안에서 다뤄지는 진실의 파편을 누락되지 않게 보도하는 데 충실했다는 편이 더 맞을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며 짚고 넘어가야 하는 많은 문제들은 단번에 눈에 보이지도, 명쾌한 결론을 품고 있지도 않다”며 “그 복잡함을 나누고 싶었다. 일도양단의 결론을 내자며 세상 모든 이슈가 법원으로 향하는 요즘, 법정 안에서 쓰인 이 글들을 읽고 오히려 법정 밖으로 눈을 돌려야만 ‘정답’이 아닌 ‘좋은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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