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호두까기 인형'은 이렇게 탄생했다

조성관 작가 2022. 12. 2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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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극 '호두까기 인형' 포스터 / 사진=네이버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공연예술계에는 계절별 프로그램이 있다. 영어로 하면 시즈널 레퍼토리(seasonal repertory).

먼저 연극을 보자. 영미권에서는 매년 12월이 되면 가족이 함께 관람하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작품들이 일제히 무대에 오른다. '크리스마스 캐럴', '올리버 트위스트', '피터팬' 등이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은 언제나 높은 예매율을 기록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와 '피터팬'은 어린이가 주인공이다. '크리스마스 캐럴'과 '올리버 트위스트'는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는 20여년을 주기로 영화로도 지속적으로 만들어진다. 주인공 올리버에 호응하는 새로운 어린이 세대가 등장하면 그들을 겨냥한 새로운 버전의 영화가 나온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누구나 아는 대로 심보가 고약한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가 주인공이다. 피도 눈물도 없고 오로지 돈밖에 모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와도 가슴은 냉골이다. 그러다 외로움에 떠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서서히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다. '피터팬'은 제임스 배리가 자신의 소설을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희곡으로 바꿔 연극 무대에 올린 것이다.

우리나라 뮤지컬계와 연극계는 이렇다 할 연말 트렌드를 발견하기 어렵다. 이와 달리 무용계는 수년 전부터 뚜렷한 트렌드가 자리 잡았다. 봄, 여름, 가을은 대체적으로 무용극의 비수기다. 그러나 연말연시가 되면 무용계는 초호황을 맞는다. 오죽하면 12월에 돈을 벌어 1년을 먹고산다는 얘기가 나올까.

연말 무용계를 호령하는 제왕은 단연 '호두까기 인형'이다. 부모가 어린이와 함께 관람할 수 있는 무용극이다. 생후 48개월부터 관람이 가능하니 어린이가 경험할 수 있는 첫 발레다. 할아버지·할머니가 손주들 손을 잡고 공연장 나들이가 가능하다. 3대 관람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공연이다.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UBC)의 서울 공연은 지난 11월말에 총 25회차 6만석이 완판되었다. 이 같은 현상은 비단 서울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광역시를 넘어 지방 중소도시까지 확산되는 양상이다. 불가리아발레단은 아예 자국에서는 공연을 하지 않고 한국에서 연말공연을 정기적으로 한다.

십수년 전만 해도 연말 무용극의 인기 레퍼토리는 단연 '백조의 호수'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서서히 '호두까기 인형'이 '백조의 호수'를 밀어내더니 이제는 부동의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

'호두까기 인형'은 크리스마스 전날 밤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로 받은 소녀가 환상 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다. 소녀가 주인공으로 나오다 보니 어린이들이 쉽게 이야기에 공감한다.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는 어린이들에는 스토리의 흡인력이 더욱 강하다.

1888년의 차이콥스키 / 사진=위키피디아

"다시는 발레곡을 작곡하지 않겠다."

'호두까기 인형'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게 189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됐다. 그러니까 올해는 '호두까기 인형' 탄생 130주년이 되는 해다.

'호두까기 인형'은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함께 러시아 3대 클래식 발레로 꼽힌다. 발레는 펜싱처럼 프랑스가 원조다. 그래서 발레 용어는 전부 프랑스어다. '파드되(Pas de Deux)', '바뜨리(batterie)'…. 그런데 우리는 발레 하면 원조국인 프랑스가 아닌 러시아를 떠올린다.

왜 그런가.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음악 때문이다. '백조의 호수'가 초연한 것은 1877년이고, '호두까기 인형'은 1892년 작품이다. 자그만치 15년의 시간 차가 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차이콥스키가 첫 번째 발레곡 '백조의 호수'를 작곡한 것은 1876년. 초연은 1877년 3월,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이뤄졌다. 그런데 관객들의 '혹평'이 쏟아졌다. 관객들은 2막 전주곡 오보에 연주까지 낯설어했다. 우리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왜 모스크바 관객들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에 고개를 저었을까. 그전까지 귀에 익숙했던 음악과는 너무도 다른, 혁신적인 작품이어서다. 차이콥스키 이전의 발레 음악은 반주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발레곡은 주제를 끌고 가면서 안무를 종속적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포스터. /사진=네이버

'백조의 호수'를 작곡할 즈음 차이콥스키는 이미 교향곡, 피아노협주곡 등으로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든든한 후원자도 만나 돈 걱정 없이 작곡에만 전념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작곡가가 심혈을 기울여 쓴 작품이 싸늘한 평가를 받았으니 그 충격이 어땠을까. 그는 다짐했다. 다시는 발레곡을 쓰지 않겠노라. 실제로 그는 발레곡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백조의 호수' 악보는 볼쇼이극장 악보 보관실에 처박혔다. 아무도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제국극장 감독관 브세볼로즈스키 차이콥스키 발레음악은 그렇게 볼쇼이극장 창고에서 좀이 슬고 있었다. 1886년 안목과 실력을 갖춘 인물이 마린스키 제국극장 감독관으로 부임했다. 이반 브세볼로즈스키(1835~1909).

브세볼로즈스키는 주프랑스대사관을 비롯한 서유럽에서 외교관으로 두루 근무한 경력이 있는 예술적 소양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그가 마린스키 극장 감독관으로 부임하고 보니 모든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러시아 발레가 삼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은 음악이 조잡하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극장을 개혁하기로 한다. 가장 먼저 칼을 댄 곳은 종신직 발레 작곡가 레온 민스크 해고! 옛날 방식만을 고집하는 민스크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새로운 발레작곡가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차이콥스키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시대에 한참 뒤처진 러시아 발레음악에 새바람을 일으킬 사람은 차이콥스키밖에 없다.'

1903년 러시아 전통의상을 입은 브세볼로즈스키 /사진=위키피디아

1886년 그는 새 대본을 골라 작곡가에게 보내 작곡을 의뢰한다. 그러나 이 대본은 작곡가에게 퇴짜를 맞았다. 1888년 그는 다시 새로운 대본을 준비해 정중하게 작곡을 의뢰한다. 페로의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대본으로 각색한 것이었다. 이 대본이 작곡가의 마음이 움직였다. 작곡가는 이런 답장을 보냈다.

"저는 지금 대단히 바쁜 와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의 의뢰를 수락할 수밖에 없군요. 대본은 잘 보았습니다. 이 발레는 형언할 수 없이 저를 매혹하고 열광시키고 있다는 것을 솔직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디어가 계속 떠오르고 있습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훌륭한 작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지금은 그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1890년 1월, 마린스키 극장에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초연되었다. 차르 알렉산드르 3세도 신작 발레의 역사적인 초연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비평가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브세볼로즈스키는 달랐다. 혁신적인 선율 속에서 예술성과 대중성을 읽어냈다.

그는 또다시 작품을 의뢰한다. 이번에는 독일작가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왕'을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가 각색한 '호두까기 인형'이었다. 1892년 12월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관객으로부터 비로소 안무와 음악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마린스키 극장 전경. 이 극장에서 '호두까기 인형'과 '잠자는 숲속의 공주'가 초연되었다 /사진=조성관 작가

클래식 발레 음악이 재조명된 것은 뜻밖의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1893년 11월 6일 작곡가가 급사했다. 당국은 콜레라 감염이 사인이라고 발표했다. 교향곡 6번 '비창'을 초연한 지 9일만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마린스키 극장은 차이콥스키 추도공연을 열기로 결정한다. 예정일은 11월18일. 안무감독 프티바가 모스크바로 가 볼쇼이극장이 보관 중인 '백조의 호수' 악보를 구한다. 그리고 감독관은 '백조의 호수' 2막을 추도연주회에 넣기로 결정한다. 청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자신감을 얻은 브세볼로즈스키는 1895년 '백조의 호수' 전막을 마린스키 극장에 올린다. 관객들은 환호했다. 작곡가의 죽음이 '백조의 호수'를 완벽하게 부활시킨 것이다. 마린스키 극장은 뒤이어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 '호두까기 인형'도 차례로 무대에 올렸다.

그 '호두까기 인형'에 지금 우리는 열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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