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여성 작가의 글을 현대 여성 작가가 잇다···‘소설, 잇다’ 시리즈 출간
백신애(1908~1939)의 유작 <아름다운 노을>(1939) 내용은 파격적이다. 아들 하나를 둔 서른두 살 과부 순희와 자신에게 구혼한 사람의 동생인 열여덟 살 정규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문학평론가 이지은은 “당시나 오늘날에나 파격적으로 읽히는 것은 젠더 배치가 역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성을 창작 주체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 재현하지 않았다. 화가 순희는 정규를 본 순간 “전생을 통하여 그려보려고 욕망”한 얼굴을 발견한다. 애욕의 주체도 순희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작가정신)의 표제작인 최진영 소설 주인공 이름도 순희와 정규다. 현대의 순희는 사십 대, 정규는 이십 대로 바꿨다. 최진영은 백신애 소설을 변주하되 사랑 이야기를 이어 쓰려 했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세계를 뒤덮은 혼란 속 두 여자의 로맨스”를 그린 전작 <해가 지는 곳으로>에 이어 “여자와 여자의 사랑에 다시 기대고 싶었다”고 했다. 최진영 소설에서 정규는 여성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소설에 이어 낸 에세이 ‘절반의 가능성, 절반의 희망’에서 최진영은 여자와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쓰려고 할 때 가스라이팅, 스토킹 범죄, 그루밍 범죄, 데이트폭력, 교제살인, 디지털성범죄, 불법촬영 같은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아 우려했다고 한다.
최진영은 정규의 편의점 노동에서 일단을 전한다. 어느 날 밤 무례한 남자 손님이 계산 중에 정규에게 시비를 걸곤 혼잣말로 위협하고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갔다. 정규는 퇴근할 때 외진 곳에서 남자가 공격하는 상상을 한다. 냉장고를 정리하는 자기 등에 칼을 겨누는 강도도 상상한다. 일상에서 성추행도 당했다. 집 현관 앞에선 늘 주변을 둘러본다. 편의점 같은 시간대 온 손님이 순희다. 두 사람은 정규의 또 다른 일터인 펍에서 우연히 만난다.
최진영은 에세이에서 “여성을 비롯하여 소수자를 억압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공포”라는, 백신애와 같은 생각을 품고 소설을 쓰는 것만 같다고 했다. 백신애 소설 주인공은 ‘남편 외도를 목격하며 미쳐버린 여성’ ‘가부장제로부터의 탈피를 부르짖는 이혼한 신여성’ 등이다. 최진영은 백신애의 <광인수기>(1938) 중 “나를 영 사람으로 여기지 않더라”는 문장을 여러 번 밑줄 그으며 읽었다고도 했다.
책은 백신애의 <아름다운 노을>과 <광인수기>, <혼명에서>(1939)도 실었다.
‘소설, 잇다’ 시리즈 첫 번째 책이다. 작가정신은 10권을 내려 한다. 출간 예정 작가는 강경애-한유주, 김말봉-박솔뫼, 김명순-박민정, 박화성-박서련, 이선희-천희란, 임순득-장류진, 지하련-임솔아 등이다. 작가정신은 “근대 대표 여성 작가들의 중요 작품을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현대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변주함으로써, 근대 여성 작가의 마땅한 제 위치를 찾아내고,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현대 작가가 어떻게 당당히 그 궤적을 이어 나가고 있는지 확인해보려 한다”고 했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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