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칼럼]미국의 무역정책이 강경해지는 이유
전후 자유무역시스템 만들어 낸 美
스스로 규정 어긴다는 부담 있지만
독재 정권의 서방세계 협박에 맞서
민주주의 수호하는 것이 훨씬 중요
도널드 트럼프의 무역전쟁이 1면 머리기사였던 때를 기억하는가. 트럼프가 부과한 관세 중 일부가 아직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국제 무역규정을 집행하는 세계무역기구(WTO)는 이 같은 관세가 미국의 국가안보를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워싱턴의 주장에 타당성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조 바이든 행정부는 WTO를 향해 상관하지 말라며 거칠게 응수했다.
이는 절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트럼프의 신경질적인 관세 부과보다 훨씬 심각한 사태다. 바이든 행정부의 무역정책은 놀랄 만큼 강경해졌다. 트럼프가 엄포와 겁주기로 일관한 데 비해 바이든은 조용히 세계 경제 질서의 기본 틀을 바꿔놓고 있다.
1948년 이래 시장 경제국들 사이의 교역은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 1994년 GATT는 WTO 규정과 합쳐졌다. GATT·WTO 시스템은 특별한 수준의 관세를 의무화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관세를 부과하거나 국제 교역에 다른 제한을 가하는 것을 금지했다. 특정하고도 구체적인 조건에 처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과거의 무역협정 결과를 그대로 고정해놓은 셈이다. 다만 WTO 규정 21조는 예외적으로 “회원국의 중요한 안보이익을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트럼프는 분명 이 같은 특례조항을 악용했다. 캐나다산 강철과 알루미늄 수입에 따른 심각한 위협으로부터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해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듣는 사람의 귀를 의심케 한다. 결국 캐나다산 금속 제품에 대한 관세는 사라졌다. 다만 중국에 매긴 관세는 아직도 유효하다. 게다가 바이든 행정부는 이 문제에 관해 WTO에는 관할권이 없다고 선언했다. 국가안보를 위해 무역 제한 조치를 취할지 여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정에 달렸고 국제기구는 워싱턴의 판단에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얘기다.
우파에 따르면 바이든과 그의 일당은 세계화주의자이고 미국의 국익이 걸린 문제에 대해서조차 중국에 강력히 맞서지 못한다. 그렇다면 바이든 정부가 그토록 강경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부분적인 대답은 독재정권들이 세계의 민주주의국가들에 가하는 위험을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이전에 비해 훨씬 강하게 의식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독재자들이 합당한 이유가 없을 때조차 종종 군사력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줬다. 게다가 천연가스 공급을 차단해 유럽을 벌주려는 블라디미르 푸틴의 시도는 경제적 협박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중국은 러시아가 아니지만 독재국가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는 현대 세계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반도체에 초점을 맞춰가며 중국이 가하려는 위협을 제한하려 하고 있다.
한편으로 미국은 반도체 생산 국가들 가운데 특히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국내 생산 업체들에 정부 지원금을 제공하고 있다. 그 외에도 워싱턴은 반도체 첨단 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제한할 의도로 이보다 훨씬 극단적인 새로운 규정을 마련했다. 중국의 기술적 역량을 고의로 위축시키려는 시도다. 필자가 긴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국의 이 같은 극단적 조치가 국제무역 규정에 위배된다며 중국이 WTO에 제소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발 앞서 WTO가 상관할 사안이 아니라는 신호를 보냈다. 미국의 새로운 규정은 WTO의 관할권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제까지 바이든 행정부가 거둔 최대의 정책 성과는 ‘인플레이션감축법’이다. 이 법은 이름과 달리 청정에너지 기업에 정부 보조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정부 보조금은 북미에서 조립된 전기자동차에 한해 세제 혜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강하다.
단언하건대 인플레이션감축법을 통과시키는 데 이 같은 경제적 민족주의는 필수적이었다. 국제기구에 제소될 경우 바이든 행정부가 어떻게 도전을 막아낼지 필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아마도 환경보호가 국가안보 이슈에 해당한다는 논리를 펼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상 전후 무역 시스템을 만들어낸 미국이 스스로의 전략적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규정을 어긴다면 보호무역주의를 전 세계적으로 확대하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행정부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 GATT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지구라는 행성을 구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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