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덩이 전세사기피해]① 곳곳에 '빌라왕'…속수무책 피해자들
올해 수도권 보증사고 780여건…경매에 집 넘어간 피해자들도
[※편집자 주 = 세입자들이 집주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전세사기 피해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올해 서울·경기·인천에서만 800건에 가까운 보증사고가 나면서 상당수가 사회초년생인 피해자들이 주거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연합뉴스는 피해 사례와 함께 이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예방책을 다루는 기획기사 2편을 송고합니다.]
(인천=연합뉴스) 최은지 기자 = 전국 곳곳에서 세입자가 제때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전세 보증사고가 속출하고 있다.
전세 보증금만으로 주택 여러 채를 사들인 뒤 유령 법인에 건물을 팔고 잠적하거나, 지원금을 미끼로 높은 보증금에 세입자들을 끌어들이고는 '바지사장'에게 건물을 통째로 떠넘기는 사례도 있다.
수도권 빌라·오피스텔 1천139채를 갖고 있다가 숨져 세입자 수백 명에게 피해를 준 '빌라왕' 김모(42) 씨도 바지사장 중 하나였다.
전세보증금만으로 주택 '매집'…수익 내고 잠적
통상 신축 빌라나 오피스텔의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은 80∼90% 수준으로 아파트보다 높다.
적은 자본으로 쏠쏠한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부동산 시장 호황을 타고 빌라, 오피스텔의 신축·분양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거래가 많지 않아 시세가 불투명하다는 점을 노려 매매가보다 전세가가 더 높게 책정되는 사례마저 속출하는 실정이다. 이른바 '깡통전세'이다.
이는 자기자본이 전혀 없더라도 세입자의 전세 보증금만으로 집값을 치르고도 수익을 남길 수 있는 구조를 가능케 했다.
최근 국토교통부가 경찰 수사를 의뢰한 임대업자 3명은 이러한 허점을 노려 전세보증금을 받아 잔금을 치르고 서울 소재 빌라 여러 채를 사들였다.
이들은 만기를 맞은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렵게 되자 서류에만 있는 '유령 법인'에 모든 빌라를 판 뒤 잠적해버렸다.
건축주와 브로커가 전세가를 인위적으로 높여 차액을 나눠 갖고는 '바지사장'에게 건물을 떠넘기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건축주로부터 수수료를 받은 브로커들이 "이자 지원금을 주겠다"며 시세보다 비싼 보증금에 세입자를 끌어들인 후 그 건물을 바지사장에게 고스란히 넘기는 방식이다. '빌라왕' 김씨가 바로 이 바지사장 역할을 했다.
실제로 빌라왕 피해자인 A(39)씨가 보증금 2억1천500만원에 김씨와 전세계약을 맺은 집 매매가는 전세가와 똑같은 가격이었다.
A씨는 당시 김씨의 주택 매입가를 알지 못했지만, "전세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하다"는 말에 안심하고 계약했다가 보증금을 날릴 처지에 놓였다.
1개 동만 있는 '나홀로 아파트'와 빌라를 중심으로 전세사기 피해가 잇따른 인천 미추홀구는 대표적인 피해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숭의동 모 아파트의 경우 전체 세대를 소유한 임대인이 아무런 통보 없이 세금을 체납하고 주택담보대출을 갚지 않아 대다수 물건이 경매로 넘어갔다.
부동산 공인중개사들은 2억원 한도의 공제증서와 이행보증서를 써주며 계약을 성사시켰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보증도 이뤄지지 않았다.
2억원 한도의 공제증서는 중개인의 1년 계약 전체 건수의 보장 한도가 2억원임을 의미하는데, 중개인들은 개별 계약 건마다 2억원을 보장하는 것처럼 설명하며 계약을 알선했다.
김인만 부동산경제연구소장은 "예를 들어 매매가 3억에 전세가 3억1천만∼3억2천만원으로 맞추면 돈 한 푼 안 들이고 차익을 얻을 수 있는 구조"라며 "부동산 시장 침체기에 접어들면서 20∼30대 사회초년생을 중심으로 피해자가 줄줄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수도권 보증사고만 786건…경매로 길거리 나앉게 된 피해자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달까지 수도권에서 전세 계약 종료 후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보증사고 건수는 786건에 달했다.
이 중 서울이 277건으로 가장 많은 사고 건수를 기록했다. 다음이 인천(274건), 경기(235건) 순이었다.
지난달 전국의 피해 세입자들이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은 1천862억원에 달해 10월보다 22%나 늘었다.
특히 미추홀구에서는 아파트 19곳에서 651세대가 전세사기 피해를 당해 주택이 임의경매로 넘어갔다.
일부 세대는 이미 경매에서 낙찰까지 돼 이른 시일 안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경찰 수사가 끝나지 않아 민사소송도 어려운 상황에서 경매가 진행되면 '강제 퇴거'를 피하기 어렵다는 것이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낙찰자들은 피해자들에게 낙찰 금액보다 높은 가격에 집을 되사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1살 아기를 둔 피해자 B씨 부부는 "낙찰자가 1억8천만원에 집을 사가라고 했지만, 8천만원 넘는 보증금도 돌려받지 못한 상황에서 자금을 구할 방법이 없다"며 "아기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부동산으로부터 기다리라는 소리만 듣다가 집이 경매에 넘어가 낙찰까지 됐다"고 하소연했다.
일부 아파트에서는 세입자들이 관리비를 매달 납부하는데도, 관리사무소가 시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는 등 2차 피해도 빚어지고 있다.
주택 소유주인 임대인이 보증금조차 주지 않고 잠적하면서 건물 관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주애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집이 경매에 넘어간 뒤 전기가 수시로 끊겨 엘리베이터에 주민이 갇히고 천장에서 물이 새는 등의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며 대책 마련을 호소했다.
chams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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