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와 벽화 사이... '갈지자(之)' 오간 ‘낡은 집’ 정책 20년
편집자주
좁은 골목, 낮은 담, 녹슨 철대문. 금 간 벽체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단독주택. ‘응답하라 1988’에서나 봤던 그 낡은 집들은 지금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한국일보는 3개월 간의 작업을 통해 1970년 전에 지어진 노후 단독주택의 구체적 규모와 세부 입지를 통계화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늙은 집들은 좁은 길과 가파른 언덕에 포위되어 도시 곳곳에 섬처럼 존재하고, 그 안에선늙은 집을 탈출할 수 없는 사람들이 집과 함께 늙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서울 노후주택 2만 3,000채와 거주자 5만명(추정)의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기획취재는 저희가 정성 들여 제작한 인포그래픽으로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박제된 나의 집:서울 노후주택 리포트] [단독] 쩍쩍 갈라지고 파여도...노후주택 75% 점검조차 없었다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신도시급 대규모 재개발을 추진해 (왕십리·길음·구파발의) 도시 환경을 강남 수준으로 끌어올리겠습니다."
(2002년 10월 23일 강북 뉴타운을 발표한 이명박 서울시장)
지난 20년 간(2002~2022년) 서울 시정은 보수(이명박·오세훈 10년 4개월)와 진보(박원순·8년 8개월) 시장들에 의해 비슷한 기간 동안 양분됐다.
그 첫 시기인 '이명박(MB) 시대' 4년(2002~2006년)의 키워드는 ①환승할인 ②청계천 ③뉴타운이었다. 특히 노후주택 밀집지를 넓은 구역으로 싹 밀고 새 아파트를 짓는 뉴타운은 'MB식 불도저 시정'의 상징과도 같은 개발이었고, 원주민과 세입자가 푼돈을 받고 쫓겨가는 등의 부작용이 속출했다.
"뉴타운과 재개발이 행복한 삶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도시재생을 통해 아파트보다 훨씬 더 삶의 질이 높아지는 도시가 되면 좋겠습니다."
(2019년 4월 8일 시민정책대화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
그런 뉴타운의 대안으로 추진된 것이 바로 박원순 전 시장(2011~2020년 재임)의 도시재생 사업이다. 기존 주거지를 부수는 식의 개발 대신 노후주택 밀집지의 주변 환경을 개선해 쇠락한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도시재생 사업 역시 골목길 벽화 조성 등 환경미화에만 치우쳐, 오래된 집에 거주하는 이들의 실제 삶의 질을 개선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환경 개선이 부진해 노후주택 지역이 계속 슬럼화한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박제된 나의 집] ③개발-재생의 이분법을 넘어
싹 밀어버리거나, 환경미화만 하거나. 20년 간 서울시가 '낡은 집'을 대하는 정책의 기조는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갔다. 하지만 완전히 부수고 다시 집을 짓는 것도, 집을 그대로 두는 대신 전망대를 세우고 벽화를 그리는 것도 정확한 답은 될 수 없었다.
이명박·오세훈 시대에 추진된 뉴타운 사업은 '재개발→투기꾼 난립'이란 공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대적 재개발 탓에 집값이 비싸지면서 원래 노후주택에 살던 원주민 중 '뉴타운'에 정착한 비율은 절반에도 못 미쳤다.
오세훈도 우려했던 MB표 뉴타운
서울에 ‘뉴타운’이란 말이 본격적으로 회자된 것은 이명박 전 시장이 취임한 2002년부터였다. 당시 강남 지역 집값 폭등으로 강남·북 간 불균형 문제가 본격화하자, 이 전 시장은 "강북지역 노후 불량주택지를 계획적으로 정비하겠다"며 뉴타운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 여러 개의 재개발 구역을 묶어 대규모 정비 사업을 하는 방식이었는데, 동네 전체가 싹 밀리고 모두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설 정도로 규모가 큰 사업이었다.
서울시는 2002년 길음·왕십리·은평을 뉴타운 시범지구로 정했다. 처음에 507만 9,400㎡였던 사업지 면적은 2003년 11월 돈의문, 한남 등 11개 지구가 지정되며 1,332만 3,000㎡로 늘었다. 오세훈 시장 시절에도 계속 늘어난 뉴타운 사업지구는 2007년 4월까지 총 26개 지역, 2,384만 7,000㎡(약 721만 평) 규모로 확장됐다.
"(뉴타운 소식에) 외지인들이 들어오더니 평당 400만원 땅이 평당 2,000만원이 돼 버렸어요."
(성북구 길음동 주민 김영식 씨)
그러자 개발 차익을 노린 투기꾼들이 준동했다. 특정 지역 뉴타운 지구 지정 소식이 들릴 때마다 그곳은 투기판이 됐다. 오랜 시간 뉴타운 지구에서 산 토박이들은 ‘폭격 맞은 기분’이었다고 털어놨다. 서울역사박물관이 2009년 진행한 지역조사자료 ‘길음동 사람들’에 따르면, 조사 당시 원주민으로 3대째 살며 통장 일을 하던 김영식(1953년생)씨는 “(뉴타운 지정 후) 땅 주인 90%는 투자자였고 (원주민에겐) 넉넉한 보상도 없었다"며 "동네 사람들은 분열됐고 원주민은 폭격을 맞아 동네를 떠났다"고 말했다.
통계로 봐도 김씨의 말은 사실이었다. 참여연대가 제공한 서울시 주거환경개선정책 자문위원회 공청회 자료(2009년)를 보면, 뉴타운 지구의 매매가 5억 원 미만 주택 비율은 뉴타운 사업 전에는 86%였으나 사업 후엔 30%로 크게 줄었다. 평균 주택 가격은 사업 전 3억 9,000만 원에서 사업 후 5억 4,000만 원이 됐다. 4,000만 원 미만 전셋집 비율은 사업 전까지 83%였지만 사업이 끝나자 완전히 사라졌다.
싼 집이 줄어드니 원주민의 재정착은 당연히 어려웠다. 시장도 이런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뉴타운 부작용 때문에 서울 집값 상승률이 최고치(연 18.8%)를 찍던 2006년 취임한 오세훈 시장은 2008년 4월 뉴타운 관련 대시민담화문을 내고 “(뉴타운 사업이 부동산 값을 상승시켜) 사업비가 높아지고 원주민들은 외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며 "이로 인해 원주민의 재정착률이 30%대에 머무르고 있는 점은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부작용을 인정했다.
뉴타운을 포함한 소위 ‘개발구역’ 내에 속하기만 하면 낡은 집이라도 투기꾼의 먹잇감이 된다는 공식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토지·건물 빅데이터 플랫폼 ‘밸류맵’이 지난해와 올해 매각됐던 노후도 30년 이상의 서울 단독주택들을 표본 분석한 결과, 매입 2년 미만 시점에서 2배 이상의 차익을 남기고 팔린 거래 71건 중 개발구역(주택재개발·지구단위계획 등) 내에 들어간 노후주택은 46건으로 65%를 차지했다. 이창동 밸류맵 리서치팀 리더는 “이와 반대로 개발구역 바깥에 있는 노후 단독주택의 경우, 매입 후 아무리 오랫동안 갖고 있어도 집값은 오히려 떨어져 수익률이 마이너스였다”고 분석했다.
3년간 2조 쓰면서 성과 못 낸 도시재생
오세훈 시장이 중도 퇴임하고 2011년 10월 박원순 시장이 취임하자, 서울시는 노후주택 정책을 '개발'에서 '보존'으로 180도 선회했다. 서울시는 2012년 1월 뉴타운-정비사업 신(新) 정책구상을 발표하며 “공동이용시설 설치 지원, 마을 만들기 사업 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도시재생 사업이다.
2014년 종로구 창신·숭인 지구 지정을 시작으로 서울시는 지난해 하반기까지 6차에 걸쳐 총 54개의 도시재생 사업구역을 정했다. 최근 본보가 입수한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이 사업에는 최근 3년 간(2020년~올해 11월)에만 2조 466억 원의 예산이 배정됐다. △(서울)시비 8,300억 원 △국비 1,950억 원 △구비 344억 원 △민간투자 1,094억 원 등으로 이뤄졌다.
"골목 안쪽에 사는 주민들이 집수리를 하려고 하면 별 핑계를 다 대면서 비용 세 배를 달라고 해요."
(윤종복 서울시의원)
그러나 현장에선 실패로 끝났다는 의견이 다수다. 수십 년 간 종로에 살았고, 2014년부터 8년 간 종로구 의원을 지낸 윤종복 서울시의원은 창신·숭인 지구의 도시재생사업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목격한 산 증인이다. 그는 “도시재생 사업 후 이 지역 노후주택 중 (사업 지원을 받아) 수리가 된 것은 차 다니는 길 주변의 일부 집들 뿐"이라며 "나머지 집들은 수리를 엄두도 못 내 슬럼화가 가속화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창신·숭인 지구는 ‘1호 도시재생 사업지’의 상징성도 있었으나 지금은 서울시도 실책을 인정하고 있다. 시의회 회의록에 따르면 지난달 2일 행정사무감사에 출석한 여장권 서울시 균형발전본부장은 “처음엔 보존 중심의 도시재생을 염두에 뒀지만 현실과 안 맞는 부분이 많았다”면서 “(창신·숭인 재생사업은) 완전히 실패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는 노후주택 수리를 지원하고, 제대로 된 주거환경정비를 하도록 재생사업의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3의 대안을 찾아서
도시재생 사업의 문제는 또 있다. 조 단위 예산을 쓰고 있음에도 성과를 가늠할 측정 지표가 전무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시 관계자는 “국토교통부와 서울연구원이 도시재생사업의 성과 지표를 만들려 했으나 대상 지역별 특성을 공통적으로 반영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말했다.
여장권 본부장은 15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2015년 도시재생 사업 전략을 짜면서 성과 측정 지표 개발을 시도했는데 사업지역 노후도 개선 등에 기여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판단하는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면서 “현재 성과 지표 보완을 위한 실무 차원의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대규모 재개발(이명박 식)이나 외형 유지에 치우친 도시재생(박원순 식)으로 노후주택 문제를 해결하는 극단적 접근은 실패로 끝났다. 주거복지 분야 전문가인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장은 입지조건이 각각 다르고 그에 따른 개발 사업성이 제각각인 노후주택의 경우, 재생과 재개발이 품을 수 없는 '그레이존'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지금의 도시개발 정책은 ‘큰 칼’과 같은 것”이라면서 “가장 필요한 대안으로는 집수리 활성화와 같은 ‘작은 칼’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시도 노후주택 집수리 사업을 추진 중이기는 하지만, 그 속도가 매우 느리다. 시의 집수리 사업을 전담하는 유관기관인 도시재생지원센터에 따르면, 현재 노후도 20년 이상의 저층 단독주택 등 16만 채가 집수리 사업 대상이지만 2018년부터 올해까지 약 4,000채의 수리를 완료하는 데 그쳤다. 이에 대해 유창수 서울시 주택정책실장은 "내년부터 주택 구조보강 지원사업과 가꿈주택사업(집수리 사업)을 연결하겠다"며 "(그 결과에 따라) 보수·보강이 필요한 노후 건축물의 집수리 비용을 확대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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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서울 '초노후주택' 2.3만 채... 그중 56%는 차도 못 가는 골목에 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316290003977
②서울 ‘초 노후주택’ 2.3만채 통계화 어떻게 했나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1814340000766
③수리도, 재개발도, 이사도 안돼요... 늙은 집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121190000960
④[단독] 쩍쩍 갈라지고 파여도...노후주택 75% 점검조차 없었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522110004952
⑤노후주택 가구주 절반이 60대 이상... 집과 사람이 함께 늙어간다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414270003639
⑥서울서 연탄 쓰는 노후주택 여전히 600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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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불도저와 벽화 사이... '갈지자(之)' 오간 ‘낡은 집’ 정책 20년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1515290004143
⑧개발-재생이 못 품는 '그레이존'... 집수리 활성화는 대안이 될까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20414380005235
글 싣는 순서
<박제된 나의 집: 서울 노후주택 리포트>
①도시의 섬이 된 늙은 집들
②오래된 집에 갇힌 사람들
③개발-재생의 이분법을 넘어
윤현종 기자 bell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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