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환주의 아트살롱]'물랑루즈!', 빨간 맛의 유혹
#. 너랑 있으면 평소에는 밤을 새우며 머리를 쥐어짜도 한 줄도 떠오르지 않던 문장들이 넘치도록 흘러나와
하지만 나는 그걸 쓰지 않을 거야
왜냐면 시간이 아까우니까
그냥 이렇게 너를 보고 있는 게 더 좋으니까
그 문장들이 모두 다 사라져서 기억나지 않게 될 때까지만 너를 볼 수 있게 허락해줘
2013년 6월, 그러니까 지금보다 9살 어렸을 적 쓴 글이다. 당시에 나는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즐겨 읽었고, 회사에 취업한지 2개월이 되었으며, 1년을 더 기다리면 장풍을 쏠 수 있다고 놀림을 받던 20대 후반의 모쏠이었다.
갑자기 9년 전의 글을 들춰본 연유란 몇 시간 전에 보고 온 뮤지컬 '물랑루즈!' 때문이고,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은 오늘(사실 30분 전에 21일은 어제가 됐지만) 돌아오는 길에 서울 거리에 쌓인 하얀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빨갛게 달군 하트 모양의 돌을 쌓인 눈 위에 던지면 그 모양대로 깊은 동굴이 생기는 것처럼, 작품의 여운이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물론, 30대 후반 경제지 기자의 가슴이란 눈처럼 폭신하진 않아서 자국이 크게 남지는 않는다.
뮤지컬 ‘물랑루즈!’는 1890년대 프랑스 파리에 있는 클럽 물랑루즈 최고의 디바 사틴과 젊은 작곡가 크리스티안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 주연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했다.
다양한 공연들을 보다보면 때때로 작품의 배경과 상황에 제대로 스며들지 못할 때가 있다. 동일시할 등장 인물을 찾지 못하거나, 공연 자체가 지루하거나, 전날의 숙취로 공연 자체에 집중을 할 수 없다거나 등등 공연에 빠져들지 못할 이유는 수도 없이 많다. 이렇게 되면 작품 속이 아닌 바깥에서 작품을 '관찰'하며 보다 더 비판적인 시각에서 작품을 볼 수 밖에 없다. '물랑루즈!'는 2시간이 넘는 긴 공연이었지만 작품 안에 제대로 들어가서 즐겁게 관람했다.
뮤지컬에는 매우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관객은 그 중 어느 한 명과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적어도 그들이 표상하는 대표적인 인간 군상을 통해 자신의 상황 혹은 주변인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어려운 말로, 극중 등장인물의 개별성을 통해 그들이 대표하는 보편적 인간상을 떠올리는 것이다.
한 명의 캐릭터 일지라도 상황에 따라 입체적으로 변화,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감정적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물랑루즈의 다이아몬드이자 화려한 디바인 사틴은 사랑하는 연인에게 "매춘부는 잊으라"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자신이 늙고 아름다움을 잃으면 지금의 화려함도 시들어 버릴 것임을 알고 있다. 화려함 속에 숨겨진 연약함은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극 중 주요 남성 배역은 △크리스티안 △몬로스 공작 △해롤드 지들러 △툴루즈 로트렉 △산티아고 등 5명이다. 크리스티안은 가난한 무명의 작곡가로 사틴과 사랑에 빠진다. 몬로스 공작은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틴은 물론 그녀들의 보금자리인 물랑루즈를 통째로 삼키려고 한다. 해롤드 지들러는 물랑루즈의 단장으로 물랑루즈를 살리기 위해 물랑루즈는 물론 사틴까지 팔아 넘긴다. 툴루즈 로트렉은 크리스티안을 물랑루즈로 인도한다. 산티아고는 열정 넘치는 댄서이자 카사노바다.
주인공인 크리스티안과 그와 대척점에 있는 몬로스 공작은 두 말할 필요 없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툴루즈 로트렉이란 캐릭터도 놓치기 아깝다. 극 중 넘버 가사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해당 구절을 들으며 크리스티안과 몬로스 대신 툴루즈 로트렉을 떠올렸다.
툴루즈 로트렉은 거리에서 구걸하던 어린 사틴을 거둬들이고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다. 하지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내 주제에 무슨, 언감생심"이라는 혼잣말을 되뇌일뿐이다. 사랑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것을 '받는 것'은 절대적인 타자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노력을 해도 그것을 가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니니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다. 물랑루즈의 댄서로 압도적인 춤실력과 매력이 있지만 사틴에 가려져 있다. 그녀는 사틴을 질투하지만 사틴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사틴이 사라져야 자신이 더 빛날 수 있지만 사틴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는 양가적인 모습을 보인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자신"이라고 교육받지만 살면서 깨닫게 된다. 세상이라는 큰 무대에서 누군가는 주인공으로, 누군가는 조연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으며 세상에 주인공은 그리 많지 않음을. 그리고 확률상 자신은 주인공보다 조연인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7월 24일의 거리'에는 이 같은 사실을 담담하지만 서늘하게 묘사한 부분이 나온다.
#. 사람의 매력이란 각자가 쌓아온 인생 경험에서 배어나온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창가 자리에 앉아 멍하게 밖을 바라보고 있는 사토시의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말이 순전한 거짓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서 연극을 한다고 치자. 어느 유치원에서든 왕자 역할을 맡게 되는 남자애가 반드시 있는 것처럼 공주 역에 어울리는 여자애가 반드시 있다.
태어난 지 고작 3, 4년밖에 안 된 아이들이 왕자나 공주 역할에 어울리는 인생 경험을 쌓았을 리가 없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인간의 화사한 매력은 인생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랑루즈!'의 음악과 가사도 매력적이다. 예를 들어 크리스틴과 사틴이 서로에게 불러주는 "네가 있는 세상, 참 아름다워"라는 가사는 단순하지만 곱씹게 된다. 단순하게 "네가 참 아름다워"라고 말하는 대신 너로 인해 세상 전체가 아름다워 지는 것이다. 박재범처럼 "니가 너무 섹시해서 눈을 뗄 수가 없어"라고 훅 치고 들어오는 것도 멋있지만, 에드 시런처럼 "나는 너라는 모양과 사랑에 빠졌어(I'm in love with the shape of you)"라고 '몸매'를 애둘러 칭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연출적인 부분도 훌륭하다. 무대의 화려한 세팅과 조명을 제외하더라도 극 중에서 서로 다른 두 명의 인물과 두 가지 상황이 교차로 진행되는데 대사들이 오묘하게 이어진다. 또 극중에서 무대에 올리는 액자식 구성의 작품에서 특정 주요 대사가 반복되는데 실제로 리허설이 아닌 최종 공연에서의 대사는 앞 뒤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레드벨벳은 이미 5년전에 이렇게 노래했다. "빨간 맛 궁금해 허니". 물랑루즈는 빨간 맛이다. 하지만 빨강의 매력은 참 다양하고 오묘해서 같은 빨강이라도 채도와 명도, 분위기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어떤 빨강은 저급하고 야해보이지만 어떤 빨강은 압도적으로 품격있고 섹시하다. 물랑루즈의 빨간 맛은 이 겨울, 30대 후반의 이미 딱딱해진 가슴을 가진 경제지 기자에게 기꺼이 초과 근무를 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다.
■'이환주의 아트살롱'은 회화, 조각, 음악, 공연, 영화 등 다양한 예술 영역의 전시, 시사회 등의 후기와 리뷰, 각종 문화 관련 칼럼을 쓰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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