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관치금융 논란, 미국에선 없는 이유
정부가 人的 제재 집착하면 官治 논란 끊이지 않고 반복될 것
지난 2020년 9월 초 미국 3대 은행인 시티그룹 마이클 코뱃 CEO(최고경영자)가 전격적으로 사퇴 계획을 발표했다. 5개월 뒤인 2021년 2월 소매금융 대표인 제인 프레이저에게 CEO직을 넘긴다는 것이었다.
2012년부터 8년 동안 시티그룹 역사상 최장수 CEO 기록을 써온 코뱃의 자진 사퇴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2008년 금융위기로 취약해진 시티그룹의 건전성을 회복시킨 그를 뉴욕타임스는 팔방미인(Jack-of-all-trades)으로 평가했다. 임기도 2년이나 남아있었다.
사퇴 배경에 대한 궁금증은 한 달쯤 후 풀렸다. 미 금융 당국이 시티그룹에 대해 “리스크 관리, 내부 통제 등의 여러 결점을 제대로 보완하지 못했다”며 4억달러 벌금을 부과한 것이다.
우리 돈으로 5000억원이 넘는 엄청난 벌금은 시티그룹의 실수에서 비롯됐다. 2020년 8월 시티그룹은 부실화된 화장품 업체 레블론(Revlon)의 채권자들에게 9억달러를 송금했다. 직원의 실수였다. 시티그룹은 송금 오류를 발견한 직후 반환을 요청했지만, 일부 채권자의 거부로 5억달러를 회수하지 못했다. 미 금융 당국은 이 사고의 책임을 물은 것이다.
벌금이 확정되자 은행 담당 애널리스트들은 콘퍼런스콜(전화회의)에서 “왜 당장 물러나지 않느냐”며 코뱃을 몰아세웠다. 코뱃은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갑작스러운 경영 공백을 막기 위해 퇴진과 후계자 승계 계획을 미리 마련한 것이다.
미 금융 당국의 제재는 금융 사고의 재발을 막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회사에 벌금을 물릴 뿐 CEO 등 경영진을 징계하진 않는다. 인적(人的) 청산보다는 시스템 개선에 주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벌금 자체가 워낙 거액이기 때문에 회사 주가가 떨어지게 되고, 성난 주주들이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하는 것이 거의 공식처럼 굳어져 있다. CEO의 퇴진을 금융 당국이 결정하지 않고 시장과 주주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금융 당국이 경영진에 대해 직접 직무정지 등 인적 제재를 내리고 회사에 대한 과태료는 적게 물리는 우리나라와 다르다.
연말을 앞두고 국내 금융권에서는 금융사 회장 연임을 둘러싼 관치(官治) 논란이 한창이다. 우리금융 손태승 회장이 라임펀드 불완전 판매 혐의로 중징계를 받은 데 이어 무난한 3연임이 예상됐던 신한금융 조용병 회장이 전격 사퇴했다. 손 회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 것으로 생각한다”며 압박에 나섰다.
금융권의 의견은 갈려있다. 정부가 공기업도 아닌 민간 금융사의 인사에 관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에 맞서, 주인 없는 회사에서 회장들이 장기 집권하는 것은 ‘황제 경영’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이번 사태가 어떻게 결론날지는 예단할 수 없지만, 이 참에 확실히 해둬야 할 원칙이 있다. 미국처럼 정부가 개입할 필요가 없도록 시장이 알아서 작동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주와 이사회, 행동주의 펀드, 애널리스트 등 이해관계자들의 회장 선출에 영향력을 키울 제도적 기반을 정부가 마련해야 한다. 지금처럼 한 번 회장이 되면 연임은 식은 죽 먹기인 구조가 지속되면 정부의 개입을 피할 수 없다.
정부도 실효성을 높일 수 있도록 제재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인적 제재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보다 경미한 벌금 수준을 대폭 높여야 한다. 금융 당국은 지난 2015년 9월 개인 중심의 제재를 금전 제재로 전환하는 내용의 ‘금융 분야 제재 개혁 추진 방안’을 발표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흐지부지됐다. 당국 스스로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제도를 고치지 않는 한 제2, 제3의 관치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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