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 good old days
초등학생 쌍둥이 아이들의 하교 시간이 평소보다 늦다. 전화를 걸었지만, 공허한 연결음만 지속될 뿐 응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눈길에 넘어지기라도 했나,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하교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돌아온 아이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친다. 펑펑 내리는 눈이 반가워 하굣길에 친구들과 눈밭에서 뛰어다녔다고 한다. 너무 신나게 노느라 휴대전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말이다. 지저분해진 아이들의 신발을 정리하고 젖은 장갑을 빨래통에 넣은 뒤 생각해보니 예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하굣길에 집에 바로 가기보다는 친구들과 골목을 다니며 놀다가 저녁밥 때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가는 일이 흔했던 그 시절. 휴대전화도 CCTV도 없던 시절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게 놀다가 늦게 들어와도 걱정하는 집이 많지 않았다. 오랜만에 옛 친구와 통화하며 낮에 있던 일을 이야기하다 문득 이런 말이 나왔다. “그땐 지금만큼 세상이 흉흉하진 않았잖아.” 전화를 끊고 나니 문득 그 말이 맴돈다. 과연 예전이 지금보다 나았을까?
갈수록 세상은 이전보다 나빠진다는 인식은 거의 고정관념에 가깝다. 활짝 피어난 꽃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누렇게 말라버리며, 생명력이 흘러넘쳐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젊은이들도 몇 해 지나지 않아 나이들고 쇠약해지다가 결국은 생을 다하게 된다. 결코 무너질 일이 없을 거라 여겨졌던 성벽도 시간이 지나면 기울어지고 무너지며, 비바람에도 굳건해보이던 바위조차도 닳고 마모되어 먼지로 부스러진다. 시간은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파괴할 뿐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좋았던 과거’만이 부각되어 떠오르기 쉽다. 이에 2009년 미국의 심리학자 리처드 아이바크와 리사 리비는 현재보다 과거가 더 좋았다고 여기는 경향을 ‘좋았던 옛날 편향(Good-Old-Days Bias)’이라는 이름을 붙여 설명한 바 있다.
그런데 이 과거가 더 좋았다고 느끼며 현실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이들의 이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이 보인다. 2001년 미국에서는 국민들을 대상으로 “미국은 과거에 비해 더 위험해졌는가”를 묻는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세상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인식하는 정도는 사회경제적 위치에 따라 달랐다는 것이다. 기업의 최고경영자나 정부기관 책임자는 과거에 비해 더 위험해졌다고 대답한 비율이 각각 38%, 43%로, 덜 위험해졌거나 비슷하다라고 답한 비율(60%, 53%)에 비해 낮은 반면, 투자자나 일반시민은 더 위험 대 비슷하거나 안전하다의 답변율이 각각 60대 39, 78대 20으로 전자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는 것이다. 특히나 일반시민의 위험 인식도는 여타 집단에 비해 유의미하게 높아서 5명 중 4명꼴로 과거보다 현재가 더 위험하다고 느낀다는 답변을 한 바 있다. 이런 경향은 비단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2019년 국내에서 실시한 ‘국민안전의식 조사’에서, 조사에 답한 국민들은 올해가 작년보다 더 위험해졌다고 답한 반면, 전문가들은 작년에 비해 더 안전해졌다고 답한 비율이 더 높았다. 이는 2022년 한국리서치의 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저소득층은 중류 이상의 소득층에 비해 안전불안감을 2배 이상 더 높게 느낀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사는 동년배들로, 시대와 지역, 세대에 따른 차이는 미미했으나 결과값은 크게 달랐다. 이 조사 결과들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안전과 불안에 대한 감수성은 실질적 위험의 정도에 더해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위험을 실체적이 아니라 주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이때 이 주관성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관여’의 여부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자발적으로 선택한 경우 혹은 위험에 대한 보상이 큰 경우 흔히 위험을 과소평가한다. 음주운전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도 자신은 술에 강하니 이 정도 마신 걸로는 괜찮다고 생각한다든가 자의로 과속 운전을 하는 경우, 상금이 높은 랠리에 참여하는 경우는 위험을 실질적인 확률보다 낮게 여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는 통제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은 경우, 보상이 없거나 적은 경우 위험은 과대평가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사업가와 투자가, 정부 기관과 국민, 전문가와 일반인, 고소득층과 저소득층의 위험 인식 정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자는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변수를 통제하며 위험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 있다고 여기지만, 후자는 위험 변인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조차 없이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위험에 대한 감도가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안전에 대한 불안감과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도피하려는 움직임으로 쉽게 연결되며, ‘좋았던 옛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이어지기 쉽다. 이들은 가볍게는 이미 흘러간 시대의 기억들을 ‘복고’ 혹은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예쁘게 포장하여 다시 불러오기도 하고, 심각하게는 현재를 부정하고 과거로 회귀해야 한다고 격하게 주장하기도 한다. 누구나 과거로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듯 과거에 대한 향수가 흘러넘치는 건, 결국 그만큼 지금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음을 나타내는 증거일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이 불안하고 어렵다고 느끼는 것의 이면에는 스스로의 노력과 선택이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의 선택과 노력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해주는 개인의 긍정적 믿음을 넘어, 그 개인의 믿음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신뢰성 높은 사회적 시스템이 절실해지는 세밑이다.
이은희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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