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나'라는 이름으로, '더 셜리 클럽' [책방지기의 서가]

2022. 12. 21.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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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지음, '더 셜리 클럽'
편집자주
'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샛별'이라는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셨다. 내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새벽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보면서 말이다. 가장 늦게 지는 별, 가장 일찍 뜨는 별. 샛별(금성이기도 하고 순우리말로 개밥바라기라고도 한다). 흔치 않았던 한글 이름은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기도 했고, 반가운 이름이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병원을 가면 "샛별아~ 샛별이~"라고 친절하게 부르는 이름이고(소아과가 아닌데도 말이다), 할머니가 되면 웃기겠다는 말을 듣기도 하는 이름이다.

내 이름 좀 안 불렀으면 좋겠던 10대 시절, 새 학년 교실에 들어오는 여러 과목의 선생님들은 출석부만 보면 왜 그렇게 '샛별'을 찾는지 참으로 불편했다. 그러던 어느 날의 국어 시간. 선생님이 질문을 했는데 바로 답하지 못해 얼굴이 빨개졌던 기억이 있다. 그러던 내게 선생님은 '이름값 못 한다'고 했었다. 당시 부끄럼 많았던 내게는 충격적이고도 괴로웠던 사건이었다.

이름도 유행이 있는지 어느 시기에 유독 많은 이름이 있었다. '지영' '미나' '혜정' '지혜'… 수많은 이름. 그중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던 지인은 어딜 가나 자신의 이름이 있었고, 중학교 시절 '키 큰 ○○', '키 작은 ○○', '까만 ○○', '그냥 ○○'으로 자신이 그렇게 불리는 게 싫어 같은 반에 이름이 똑같은 친구가 있는 게 싫었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스스로 짓지 않은,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을 버리고 성인이 되어서 본인이 불리고 싶은 이름을 들고 법원으로 갔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자기소개를 할 때 가장 먼저 말하는 이름은 자신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지 않느냐는 물음을 던졌다.

최근 다시 읽게 된 '더 셜리 클럽'(박서련, 민음사)은 스무 살 한국인 '설희'의 영어식 이름은 '셜리'가 소재다. 어느 날 호주에서 '셜리'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가입하는 '더 셜리 클럽'에 가입을 하면서 같은 이름을 가진 '셜리' 할머니들을 만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셜리'라는 이름을 가진 수많은 노인 여성이 등장한다. 호주에서 셜리라는 이름이 유행했던 시절에 유년시절을 보냈던 그들은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같은 이름 안에서 그들은 모두 다르다. 같은 이름으로 그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피부색도 나이도 다른 그들이지만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재미(Fun)와 음식(Food)과 우정(Friend)을 나눈다. 또 다른 등장인물은 S라는 이니셜로만 등장한다. S는 나이도, 성별도, 국적도, 성 정체성도 분명하지 않은 인물이다. 같은 이름이지만 모두 다른 정체성을 갖는 셜리들. 그 무엇도 분명하지 않지만 어떠한 사람인지 분명히 드러내는 S. 그 안에서 그들의 삶과 사랑은 눈물 날 만큼 아름답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가 된다. 네가 찾고 있는 사람에게 네가 주는 사랑이 그 사람을 완성해 줄 거다." '더 셜리 클럽'(199쪽)

지금 운영하는 서점 '러브앤프리'에서는 같은 이름을 가진 손님들을 만나곤 한다. 책을 구입하는 손님도 있고, 클래스에 참여하는 손님도 있다. 내게 그들은 '키 큰 ○○', '키 작은 ○○', '까만 ○○', '하얀 ○○'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새로운 달이 시작되면 책의 한 문장을 캘리그래피로 직접 써서 보내주는 ○○님이 있고, 새롭고 개성 있는 책을 좋아하는 ○○님은 신간이 서점에 입고되면 제일 먼저 찾아주시고. ○○님은 독서모임에 한 번도 빠지지 않는데, 매번 책을 읽으며 밑줄 그은 문장을 작성한 노트를 보면서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이름이다. 이보다 더 다양한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테고, 서점에서 잠깐 지켜본 모습보다 더 많은 모습을 가진 그들일 테다.

이따금씩 '이름값'을 이야기했던 그 시절의 선생님이 생각난다. 그분이 이야기하는 이름값이 무엇인지 여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저 나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같은 이름'을 가졌던 학교 친구들은 이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이제는 그 누구도 '키 큰 ○○', '키 작은 ○○'으로 불리지는 않을 거다. 같은 이름을 가졌지만 다른 '셜리'들의 사랑과 연대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좋은 책이 가진 힘이다. 연말에 추천하는 여러 가지 책이 있지만 따뜻하게 읽히면서도 사고의 확장을 가져다 주는 한 권의 책은 '더 셜리 클럽'이다. 표지까지 아름다워서 소장하기도, 선물하기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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