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수업을 마무리하며
[세상읽기]
[세상읽기] 조문영 |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여유 있게 한해를 마무리하고 싶지만, 이번에도 틀렸다. 한 학기 강의를 끝내고 나면 채점할 시험지며 보고서가 수북이 쌓인다. 이번 학기는 특히 중국에 관한 수업에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한-중 수교 30주년이라지만 어느 때보다 반중 정서가 심하지 않았나.
문화인류학과에서 개설된 중국 수업을 타 문화에 관한 순진한 호기심으로 신청한 학생들은 별로 없었다. ‘중국’을 알겠다는 분연한 욕구가 넘쳤다. 코로나19의 초기 방역 실패로 바이러스의 전 세계적 확산에 책임이 있는데도 인정은커녕 훈계를 늘어놓는 중국, 민주주의를 위시한 국제사회 규범과 관행을 거스르며 시진핑의 장기 독주 체제를 구축한 중국, 홍콩 민주화 시위와 무슬림 탄압, 노동·여성운동 억압 등 일련의 반인권적 사태에 대한 국제사회의 문제제기를 내정간섭으로만 일축하는 중국은 과연 어떤 나라인지 궁금해했다. 동북공정에서 베이징 겨울올림픽 ‘한복 논란’까지, 언론에서 접한 한-중 역사·문화 갈등에 관해 중국 유학생이 제 견해를 밝혀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기도 했다.
반면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은 한국 사회의 일방적인 의구심에 불만이 많았다. 이미 대국으로 부상한 나라에서 태어나 강도 높은 애국주의 교육을 받으며 자란 세대에게 ‘중국은 도대체 어떤 나라인가’라는 비난 섞인 질문은 모욕에 가까웠다. 시위라도 하듯 마오쩌둥이나 시진핑 어록을 베껴 쓰는 것으로 한주의 비평문을 갈음하는 학생도 있었다. 문화대혁명이나 천안문사건 같은 자국에서 금기시돼온 역사를 혼돈을 감수하고 새로 배우기 시작한 학생도 제 모국을 기괴하고 후진 나라 취급하는 온라인 댓글에 넌덜머리를 냈다. 수업에 참여하는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긴장이 감돌았다. 제 글과 말이 같은 중국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신경이 곤두섰다.
학생들 사이에서 상호 배움보다 판단과 확증의 열망이 앞설 때 길잡이를 하는 선생도 갈팡질팡하기 마련이다. 평등과 정의를 향한 사회주의 국가의 오랜 실험을 소개하면 ‘친중’으로, 유토피아적 실험 과정에서 벌어진 종족 학살을 언급하면 ‘반중’으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중국 학생은 한국인들이 미국에 “세뇌됐다” 하고, 한국 학생은 중국인들이 공산당에 “세뇌됐다” 한다. 분단과 냉전을 배경 삼은 소설에서 접했던 토끼몰이식 대화에 돌돌 말린 기분이다.
한 학기 동안 이 지리멸렬한 대화에서 벗어나 보겠다고 여러 시도를 했다. 한국 학생들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외부자가 아님을 인식하길 바랐다. 애플의 ‘신비주의’ 전략에 매료된 한국의 소비자는 중국 폭스콘 노동자들이 아이폰 출시 리듬에 맞춰 장시간 초과 노동을 강요받고, 기밀 유지를 위해 과도한 노동규율에 시달리는 상황에 아무 책임이 없을까? 중국 학생들은 비판을 비난과 동일시하지 않기를 바랐다. 많은 중국인이 여전히 존경하는 작가 루쉰은 중국의 역사가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시대”와 “잠시 안전하게 노예가 될 수 있는 시대”의 순환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독하게 비판한 바 있다(<등하만필>). 청년들이 철저한 자기 인식을 거쳐 악순환을 끊어내길 갈망했던 그를 서방세계에 놀아난 변절자라 매도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중국이 대한민국의 96배에 달하는 면적에 14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14억이 넘는 인구에 공식적으로 56개 민족이 모인 다민족 국가라는 점을 모든 학생이 진지하게 고려하길 바랐다. 베이징에서 나고 자란 한족 대학생이 (최근에 출간된 <신장 위구르 디스토피아>에서 자세히 묘사된) 신장지역 재교육 수용소의 현실을 얼마나 알까? 한국 기자나 네티즌이 중국 소셜미디어에서 채굴한 이야기 조각이 우연, 공모, 확증편향이 뒤섞인 채 한-중 갈등의 쟁점으로 급부상하는 과정을 어떻게 봐야 할까?
이번 수업 기말시험에서는 학생들이 중국을 ‘중국 국가’와 동일시하는 관행을 낯설게 보도록 질문을 만들었다. 대중적 공론장에서 중국이 인격화된 주어로 등장하는 경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수업에서 살핀 중국이 제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제 삶에서 어떤 중국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기를 바라는지 물었다. 무책임하게 질문을 던져놓고 눈 내리는 날 위화의 신작 <원청>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어판 서문의 한 문장을 보니 평온함이 밀려왔다. “세상에는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고,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일이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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