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훈의 근대뉴스 오디세이] 필화의 시대에도 `신천지`는 `신세계`를 꿈꿨다

2022. 12. 21.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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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훈 19세기발전소 대표·아키비스트

일제강점기 신천지 잡지 발행 日, 사회 혼란 명분 언론탄압 "언론 자유" 일치단결해 저항 백성 입 재갈 물리기 경계해야

'필화'(筆禍)란 발표한 글이 법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켜 제재를 받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필화는 권력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막기 위한 치졸한 폭거(暴擧)라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100년 전 일제강점기에도 필화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1921년 7월 13일자 매일신보에 '신천지'(新天地)라는 잡지 창간호에 대한 광고가 실린다. "최근에 신 발행된 잡지로 내용이 풍부하고 서정(敍情)이 활달하여, 사조계(思潮界)의 일대 권위라 가위(可謂; 가히 이를만 함)하겠도다." 신천지는 1921년 7월 10일 창간됐다. 편집 겸 발행인 그리고 주간(主幹)은 백대진(白大鎭)이 맡았다. 당시 이 잡지의 가격은 1부에 50전이었다.

그러나 압수, 검열 등 일제의 탄압은 명약관화했다. 1922년 9월 16일자 동아일보는 '주목할 언론계 전도(前途)'라는 제목으로 이 점을 우려했다. "조선인 신문 잡지는 그 수효가 적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중략) 어제 15일에 조선총독부에서는 신생활, 개벽, 조선지광, 신천지 등 4개 잡지를 돌연히 인가하였다 한다. 조선지광 외에 3개 잡지는 이미 발행해 오던 바인데 (중략) 이후로 우리의 잡지나 출판계는 일시 활기를 띨지도 모르나 그 반면으로는 압수나 사법의 활동이 있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으며, 더욱 더욱 걸음을 조심하여 우리의 가고자 하는 곳까지 무사히 가게 하기를 새로이 인가된 잡지 편집자와 기타 이 방면에 유의하는 인사에게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결국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고 만다. "신천지 발매 금지, 신문지법에 의하여 제일성(第一聲)을 발한 정치 시사 월보 신천지 11월호는 시대에 암매(暗昧)한 당국자의 검열망에 '일본 위정자에게 여(與)하노라'라는 기사가 이(罹; 걸리다)한 바 되어, 발송 도중에 발매 금지를 당하였기에 이에 아래 기사를 삭제하고 임시호를 발행하옵기에 근고(謹告)하옵나이다." (1922년 11월 12일자 동아일보)

1922년 11월 22일자 매일신보는 신천지 주간(主幹)이 구인(拘引)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수일 내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서는 무슨 중대한 사건을 탐문하였는지 그 안의 공기가 매우 긴장된 모양이더니, 그제 21일은 아침에는 돌연 종로경찰서에 명령을 발하여 동일 오전 9시경에 시내 필운동 154번지 신천지라는 잡지의 주간되는 백대진 씨와 그 잡지의 영업부장 겸 인쇄인 되는 장재흡(張在洽) 씨도 인치하여 경찰서 안에 유치하였다가 오후 2시쯤 되어 검사국으로 압송하였는데, 검사국에서는 곧 두 명을 엄중히 취조한 후 즉석에서 구인장을 발부하여 백대진 씨는 오후 4시경에 서대문감옥으로 넘기었고, 장재흡 씨는 7시경에 또한 서대문감옥으로 송치하였더라."

이에 맞서 언론계의 저항이 시작됐다. 1922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신생활사와 신천지사 필화 사건에 대하여 시내 각 유수한 언론 기관에 종사하는 제씨(諸氏)가 어제 오후 4시에 견지동 청년연합회에 모여 선후책을 협의하였는데, 먼저 이번 필화를 당한 두 잡지사의 보고가 있고 뒤를 이어 선후책을 협의한 결과 매일신보만 탈퇴하고 만장일치로 첫째는 이번 필화를 당하여 구인된 두 잡지사 당사자에게 대하여 동정하는 행동을 취할 일이요, 둘째는 언론 자유의 범위를 확대하라는 말을 당국에 청구할 일 등 두 가지를 결의하였는데, 참가한 언론 기관은 아래와 같더라. 조선지광사(朝鮮之光社), 개벽사(開闢社), 동명사(東明社), 시사평론사(時事評論社), 조선일보사(朝鮮日報社),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다음날 언론계·법조계 유지들이 모여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언론 취체(取締)에 속한 신천지사와 신생활사의 필화 사건에 대한 당국의 처치가 심히 가혹하다고 인정함. 오배(吾輩)는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하여 협동 노력함을 기(期; 단단히 결심하다)함." 법조계에선 박승빈(朴勝彬), 최진(崔鎭), 허헌(許憲), 김찬영(金瓚榮), 변영만(卞榮晩)이, 언론계에선 염상섭(廉尙燮), 이재현(李在賢), 최국현(崔國鉉), 남태희(南泰熙), 김원벽(金元璧), 오상은(吳尙殷), 송진우(宋鎭禹)가 각각 참여했다.

필화 사건을 일으킨 내용은 그럼 무엇이었을까. "신생활, 신천지 두 잡지사 필화 사건에 대하여 세상에는 여러 가지 풍설이 유행하여 도저히 그 진상을 알 수 없으나 (중략) 어떤 사람의 입에서 아라사(俄羅斯; 러시아)에서 돈 몇십만 원을 선전비로 가져왔다는 말이 있으나, 풍설만 있고 적확(的確)한 증거가 없으므로 (중략) 기소 여부가 아직 결정이 되지 못하였으나 기소를 한다 하면 조헌(朝憲; 국헌) 문란(紊亂)이 되는지 현안 중이라고 전하더라." (1922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

신천지 필화 사건의 백대진 주간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언도 받았다. "방청석에는 전과 같이 만원(滿員)이 되고 판사는 아래와 같은 판결문을 읽었다. '피고가 정치 문제에 대한 기사를 신천지 잡지에 기재한 것은 사실이라. 그런데 그 기사의 내용은 조선인은 누구든지 자치(自治)나 참정권(參政權)을 바라는 사람은 없다. 조선인은 1919년에 독립운동이 일어난 후 민족의식이 발달되어 조선의 독립을 달성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말하고 또 그 운동은 더욱 계속할 뜻을 보였으니, 이것은 사회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조선에 대한 제국의 통치권을 배제하려는 것이라. 신문지법에 의지한 조헌문란인 동시에 1919년에 발표된 제령 제7호 위반이라. (중략) 일반을 경계하기 위하여 징역 6개월에 처하니 피고는 그동안에 수양을 힘써 장래 문화 발전에 힘쓰라'는 것이라. 판사가 이와 같이 판결문의 이유까지 읽기는 근년에 드문 일이더라." (1922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

사기(史記) 주본기(周本紀)에 '방민지구 심우방천(防民之口 甚于防川)'이라는 글이 나온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뜻이다. 주(周)나라 소공(召公)이 여왕(麗王)에게 간한 말이다. 3000년 전 주나라에서 있었던 일이, 100년 전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지 늘 경계해야 한다. 자치통감(資治通鑒)에도 '겸청즉명, 편청즉암(兼聽則明 偏聽則暗)'이란 글귀가 나온다. '양쪽 의견을 다 들으면 밝게 되지만, 한쪽 의견만 들으면 어둡게 된다'는 뜻이다. 지금도 유용한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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