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부장칼럼]소재솔루션센터의 과제 '오픈 이노베이션'
반도체 공정의 핵심 장비인 노광 장비에서 캐논과 니콘 같은 일본 기업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양대 기업의 노광 장비 세계 시장점유율은 75%로 반도체 제조 장비의 절대 강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이들 기업의 점유율은 사라지고 네덜란드 ASML이 독점하는 시장 구도의 변화가 일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었을까. 기술적으로 ASML이 트윈스캔(TWINSCAN)·이머전·극자외선(EUV)과 같은 기술 전환기 경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런 극적인 시장 변화를 보는 또 다른 시각도 있다. 일본과 유럽의 성장 환경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이다. 현재 유럽은 메모리·비메모리에서 초미세 공정을 수행하는 반도체 제조기업이 없다. 그럼에도 ASML이 EUV와 같은 미세 공정 장비의 절대 강자가 된 이유로 '오픈 이노베이션'과 벨기에 아이맥(IMEC)과 같은 공공연구소의 존재를 주요 원인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캐논·니콘이 독자 광학 기술을 갖춘 반면에 ASML은 광학 기술도 없었고 시장에서의 존재감도 미약했다. 그럼에도 ASML은 일본의 초고밀도집적회로(VLSI) 프로젝트와 같은 개방적 연구 환경을 통해 소자 업체, 대학, 연구소, 타 기업 간 신뢰에 바탕을 둔 공동 개발을 꾸준히 진행했다는 점이다. 그 예로 ASML 대부분의 연구 논문 저자가 다수 기관 소속인 데 비해 일본 캐논과 니콘의 논문은 대부분 해당 기업의 내부 연구원만이 저자였다는 것이다. 수백개 기업·기관과 강력한 협업 체제는 ASML의 혁신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같은 협업을 통한 혁신, 즉 오픈 이노베이션에는 벨기에 뢰번에 위치한 공공연구기관 IMEC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IMEC는 1984년에 설립되어 반도체 분야에서 90여개 국가의 다수 기관에서 연구진이 파견, 공동 비용을 부담하고 연구를 진행하며 기술 개발 결과를 나누고 있다.
ASML은 노광기 개발에 필요한 레이저, 광학기술, 기계,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IMEC를 통해 다수의 기업과 협업했다. IMEC는 벨기에 정부가 전체 운영자금 일부를 부담하고 있으나 자금 대부분은 참여 기관이 분담한다. 어느 기관에도 독점적이지 않은 형태로 운영되고, 반도체 분야 노하우를 개발하고 아이디어를 테스트해서 이를 대학·기업과 공유한다.
소재종합솔루션센터의 미래 지향점을 ASML의 성장 배경인 오픈 이노베이션과 공공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지원 아래 전국에는 총 4개의 소재테스트베드인 '소재종합솔루션센터'가 있다. 한국세라믹기술원은 반도체 기초 소재인 세라믹 분야 중심으로 테스트베드를 보유하고 있다. 정부에서 다수의 연구 장비와 기업의 시생산에 필요한 설비 구축을 지원받는다. 경기도와 이천시로부터는 시설 유지에 필요한 건축물도 제공받는다. 센터는 반도체 공정에 필요한 핵심 부품·소재를 개발하고 시험 생산하는데 연간 100여개 기업 지원에 집중한다. 반도체 핵심 부품인 정전 척 등의 국산화에 기여했고, 프로브카드·히터·블랭크마스크 국산화에 집중하고 있다. 센터는 그동안의 성과에도 여전히 큰 숙제가 남아 있다. 20년 전 필자가 국내 최초로 정전 척 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할 때 최고 목표는 일본 제품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제 우리는 모방이 아닌 일본이 만들지 않은 제품을 창안해서 만들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세라믹솔루션센터라는 하드웨어 공공재 위에 오픈 이노베이션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올리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 됐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단순한 시생산을 넘어 오픈 이노베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센터의 근본적 운영 방식 변화다. 센터를 중심으로 다수의 기업과 대학을 어떻게 묶을 것이며, 공동 개발팀을 위한 자금은 어떤 방식으로 동원하고, 협업에 필요한 신뢰는 어떻게 구축할지 등 우리에게 큰 숙제가 남았다. 한국 사회 특유의 치열한 경쟁체제 장점을 살리면서도 협업을 통한 오픈 이노베이션 강점을 내재화하는 것이 관건이다. 이를 위해 센터를 운영하는 기관뿐만 아니라 초기 지원을 담당하는 정부와 참여 기업·대학 등 우리 모두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성민 한국세라믹기술원 이천분원장 smlee@kicet.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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