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공적 마인드
연주자 중 왕중왕은 단연 지휘자다. 큰 무대에서 홀로 핀 조명을 받는 피아니스트나 화려한 의상과 함께 열렬한 박수를 받는 오페라 프리마돈나도 멋있지만, 포디움 위에서 100여 명의 단원을 통솔하는 마에스트로야말로 무대의 제왕으로 군림한다. 단원들은 제왕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의 음악적 해석에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클래식의 제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오스트리아 태생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압도적인 위상으로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35년간 이끈 클래식 음악계의 전설이다. 이전까지 일부 상류층이나 고급 취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던 클래식 음악은 그의 등장을 기점으로 대중의 음악으로 성큼 다가섰다. '뉴욕타임스'는 20세기 가장 강력한 영향을 준 음악인으로 카라얀을 꼽았다. 카라얀의 음반 판매량은 2억장 정도로, 그는 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클래식 음반 매출을 올린 인물이기도 하다.
카라얀의 선배이자 거장 반열에 오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또한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악단을 장악한 인물이다. 특히, 토스카니니는 윽박지르는 리허설이 유튜브 클립으로 남아 있을 정도로 악명 높고 난폭한(?) 지휘자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마에스트로들은 권위적인 제왕의 상(像)을 소유하는 특징이 있었고, 이 현상은 어쩌면 그때의 사회 여러 분야의 지도자가 가진 공통점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사이먼 래틀이 포스트 카라얀 시대의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마에스트로 상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단원들과 음악적 해석에 관한 토론을 나누기도 했고, 쉬는 시간에 단원들과 섞여 커피를 마시며 유쾌한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제 단원들은 '얼굴 없는 단원'이 아니라, 각자가 얼굴을 드러내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회의 변화와 함께 일방적인 '지시' 관계에서 벗어나 소통을 통해 음악을 만들어가는 지휘자와 단원들 간의 '협업'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방식도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100여 명의 단원이 각자의 개성을 나타내다 보니 악단의 일체감과 조직력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려움에 떨면서 연습하던 옛날과 비교해 너무나 편한 분위기에서 연습하는 자유로움이 생겨났지만, 이 자유로움이 더 좋은 연주로까지는 연결이 안 된 것이다.
이는 프로 악단의 연주력을 향상하는 방법론에 완벽한 정답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방법이나 편하고 자유로운 방법이나 그 방법의 특징적인 장단점이 있을 뿐 '정답'은 없는 것이다.
바람직한 방법은 결국 음악감독과 단원들 사이의 신뢰감과 목표 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 서로 신뢰하는 사이가 형성되고 모든 구성원이 같은 목적을 지향하면, 불편과 불만은 잦아들고 자연적으로 조직의 발전을 가져오면서 예상하지 못한 다른 많은 보상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반면, 전 단원이 이기적으로 자기의 생각만 내세우면, 그 악단은 필연적으로 연주력 저하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이는 궁극적으로 더 많은 불편과 어려움을 초래할 것이다.
지휘자는 화려한 조명과 존경을 받는 '꿈의 직업'이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실상은 '3D' 직종에 포함될 정도로 극한 직업이다. 시쳇말로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산다'고들 하는데, 그렇다면 지휘자야말로 가장 오래 살 수 있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한다(실제로 많은 지휘자가 장수를 누린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지휘자는 잠시 머무는 '손님'일 뿐이고, 평생 악단을 책임지는 사람은 결국 단원들이다. 지휘자의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악단의 발전은 악단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자부심과 배려의 마음이 합쳐진 '공적 마인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한예종에, 넓게는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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