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찍는 투어' 2억짜리도 풀부킹 … 지갑 여는 해외 슈퍼리치
'10박에 1인당 4500만원, 오픈과 동시에 100명 완판'. 믿기지 않는 큰손들의 '싹쓸이'.카타르월드컵을 앞두고 실제 국내 여행가에 벌어진 일이다. 이 패키지를 선보인 하나투어 럭셔리 여행 전담 제우스월드팀은 난리가 났다. 저렴(?)한 게 1500만원 선. 경기장 최고급 라운지에서 응원한 뒤 골프, 사막 투어까지 포함된 패키지는 5000만원대를 찍는다. 기대도 안 했는데 결과는 완판.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다. 전 세계 여행가 큰손들이 가세하면서 동시다발적으로 이 패키지는 순식간에 동났다. 이들은 도대체 누굴까. 엔데믹(전염병의 풍토병화) 분위기 속에 요즘 여행가가 꽂힌 게 슈퍼리치 마케팅이다. 상상 초월 구매력. 그저 마음에만 들면 일반 여행족의 20~30배에 달하는 비용쯤은 기꺼이 지불하는 그들. 보복 여행 심리까지 가세하면서 '이들'이 꿈틀대고 있다.
흥미로운 건 그 중심에 대한민국이 서 있다는 점이다. 동선의 핵심 거점이 한국이 되고 있다는 의미다. '킹달러'의 구매력을 앞세운 미주 지역 슈퍼리치 등 해외 큰손들은 안전지대로 떠오른 한국으로 속속 상륙 중이다. 한동안 숨죽였던 국내 큰손들은 반대로 해외로 향한다. 그들의 동선을 추적해본다.
◆ 2억원 패키지도 풀부킹…한국이면 OK
"원더풀(wonderful)."
지난 11월 서울 5대 궁 중 하나인 경복궁의 생과방. 국왕과 왕비의 별식을 준비하던 공간인 생과방에 관광객 40여 명이 모여 극찬을 늘어놓는다. 미국 럭셔리 전문 여행사 애버크롬비 앤드 켄트(Abercrombie&Kent)가 선보인 패키지 여행에 나선 해외 슈퍼리치다. 당연히 모든 과정이 프라이빗이다. 안락함과 비대면을 위해 동원된 항공편은 프라이빗 전세기. 전 좌석이 퍼스트클래스로 개조된 이 항공편으로 이들은 한국을 포함해 베트남, 터키 등 7개국을 찍는다. 가격? 이게 기가 찬다. 1인당 무려 2억2000만원.
그렇다면 이들의 정체는? 물론 극비다. 살짝 맛만 보여드린다면, 대부분 정년 퇴임한 고위 정부 관료나 세계적 기업을 운영하는 최고경영자(CEO)다.
자, 그렇다면 뭐가 특별해서 2억원을 호가하는 걸까. 우선 코스를 보자. 경복궁, 우리옛돌박물관, 진관사 사찰, 비무장지대(DMZ) 투어까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하지만 뜯어보면 입이 쩍 벌어진다. 경복궁 생과방은 일반인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곳에서 별식을 즐긴다. 식상해 보이는 DMZ 투어도 마찬가지. 일반 DMZ 투어와는 차원이 다르다. 유엔과 협의해 공개되지 않는 곳까지 오간다. 한 달 앞선 10월. 1인당 1300만원짜리 박물관 투어 코스로 한국을 택한 단체도 있다. '킹달러'의 구매력을 앞세운 16명의 미국 여행 단체팀이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회원이 주축이 된 이 팀은 전 세계 주요 박물관·미술관을 관람한다. 이번 팀은 전 일정을 한국에서 소화했다.
내년은 한술 더 뜬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게 무려 100명 단체다. 한국관광공사를 통해 내년 방한 일정까지 확정한 상태. 흥미로운 건 국적이다. 모두 인도 출신. 인도의 큰손 여행 단체, 그것도 100명이 무더기로 한국을 찾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원래 한국을 찾는 슈퍼리치 대부분은 일본과 중국 출신이다. 드물게 미국과 유럽 슈퍼리치가 전 세계 투어를 하며 기착지 중 하나로 한국을 찍는 정도다.
한데 이번 인도팀은 다르다. 아예 목적지가 한국이다. 대부분 인도 내에서 세계적 기업체를 운영하는 CEO나 오너다. 4박5일 일정 패키지 가격은 1인당 600만원대다.
'억대' 전세기 투어도 이어진다. 1인당 9만9000달러로 책정된 전세기 투어는 한국을 찍고, 일본·싱가포르·몽골·우즈베키스탄·에스토니아·핀란드·아이슬란드 등을 24일간 돈다. 규모도 상당하다. 내셔널지오그래픽 매거진 편집장과 사진작가 등 전문가 집단 75명으로 구성돼 있다. 내년 8월 이틀간 서울에 체류하며 럭셔리 코스를 밟는다.
◆ 셀럽들 한국행도 러시…개별 여행까지
세계적인 셀럽들의 한국행도 러시다. 프라이빗한 동선을 원해 자유여행도 아닌, '의전 여행' 개념의 개별 여행 코스로 한국을 찜한다. 이들의 투어는 007 작전을 방불케 한다. 알려지지도 않는다. 그 흔적을 그나마 유추할 수 있는 게 코스모진을 통해서다. 코스모진은 독특한 여행업을 한다. 해외 VIP의 국내 '의전 관광'이다.
검정 선탠으로 외부 관찰이 완벽히 차단된 리무진 차량의 공항 영접은 기본. 1000만원을 호가하는 특급호텔 스위트룸 예약에 장소 섭외까지, 모든 동선을 관리하고 케어하는 하이엔드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렇게 은밀하게 한국을 찍고 간 셀럽들의 면면을 들으면 깜짝 놀란다. 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 프란치스코 교황, 우디 앨런 감독, 울버린으로 유명한 휴 잭맨 등 굵직한 인사가 모두 코스모진을 통해 한국의 속살을 보고 갔다.
셀럽들은 사실 럭셔리를 원하는 게 아니다. 돈이야 넘쳐나니, 고급스러움은 그저 디폴트다. 그렇다면? 맞는다. 이들이 원하는 건 '유니크'함, 특별함과 독특함이다. 예컨대 이런 식. 일반 여행족과 같이 경복궁을 가지만, 이들은 '유니크'한 다도, 왕의 다과 체험 같은 특별한 경험을 하는 식이다. 두 번의 방한 때마다 DMZ를 찾은 슈밋 전 회장의 투어도 달랐다. 판문점에 주둔하는 유엔군 관계자와 사전 협업을 통해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곳까지 둘러봤다.
20년 이상 의전 투어의 한 우물만 파온 정명진 코스모진 대표는 "한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유니크한 경험에 초점을 맞춰 동선을 세밀하게 짠다"며 "한국 최고의 소고기 구이에는 관심이 없는데, 시골 장인이 담근 된장에 수백만 원을 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게 슈퍼리치"라고 강조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에는 셀럽들의 국적도 다양해지고 있다. 코스모진이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유행) 이후 진행한 VIP 투어의 빅데이터를 조사한 결과 종전에 대다수를 차지했던 아시아 지역 셀럽 방문이 10% 이하로 낮아졌다. 대신 가나, 우간다, 모잠비크 등 북방 아프리카(40%)의 셀럽 방문이 눈에 띄게 급증하고 있다. 중동·남아메리카(20%), 미주·유럽(30%) 등 다양한 지역의 VIP가 은밀하게 한국을 찾고 있다.
정 대표는 "코로나19 사태가 슈퍼리치 투어에도 충격파를 던졌다. 보복 여행 수요가 폭발하면서 한국을 찾는 셀럽들의 국적까지 달라지고 있다"며 "예전에는 미국이나 중국, 일본 VIP 방문이 주를 이뤘다면, 코로나19 이후에는 아프리카권과 북유럽권에서도 한국을 찾는다"고 말했다.
◆ 슈퍼리치가 콕 집은 '한국', 왜?
이쯤 되면 궁금증이 든다. 왜 하필 한국일까. 국경이 닫혀버린 중국이야 어차피 못 간다 치고, 원래 아시아 럭셔리 투어의 메카는 료칸으로 대표되는 일본이다. 그런데 슈퍼리치의 눈이 팬데믹을 겪으며 한국 쪽으로 P턴한 셈이다.
관광 전문가들의 분석은 이렇다. 코로나19 사태에도 흐트러짐 없이 진행된 K방역의 힘 그리고 K컬처의 힘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만의 매력적인 '너지(nudge)' 포인트가 가세한다. 슈퍼리치가 가장 열광하는 건 북한과의 경계 DMZ다. 국경을 맞대면서 살벌하게 대치 중인 그곳을 직접 밟는 건 생경한 경험이다. 궁, 사원 같은 전통 가치를 지닌 곳뿐 아니라 오름(제주) 같은 천혜의 자원도 매력 포인트로 비친다.
슈퍼리치 유치전의 선봉에 서 있는 박형관 한국관광공사 테마 관광팀 팀장은 "팬데믹으로 발이 묶인 전 세계 슈퍼리치가 넷플릭스, 유튜브 등 플랫폼을 통해 K콘텐츠를 대거 접했고 한국에 대한 관심이 오히려 증폭됐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이런 분위기를 보면 오히려 바이러스 위기 덕에 청정국 한국이 더 부각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런 분위기는 여행 박람회로도 이어지고 있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 10월 서울 신라호텔에서 '은밀하게' 열린 여행 박람회가 있다. 한류, 공연, 의료, 웰니스를 아우르는 '럭셔리'를 주제로 열린 럭셔리 박람회다. 초청받은 13개국 33개 업체가 방한했고, 한국을 목적지로 파는 국내 셀러 여행사와 무려 400여 건의 럭셔리 투어 상담이 이뤄졌다. 박 팀장은 "'한국' 하면 저가 관광 이미지가 강했는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비대면, 고급스러운 목적지로 이미지가 바뀌고 있다"며 "명품 여행지 이미지를 대폭 강화해 럭셔리 관광 한·중·일 삼국지에서 기선을 제압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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