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왕적 대통령 뛰어넘는 ‘기이한 대통령’ [박찬수 칼럼]
박찬수 ㅣ대기자
지난 13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축구대표팀을 언급하며 “선수들에게 정당한 보상이 돌아가도록 시스템을 마련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접하고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대통령이 이런 문제까지 다 신경을 쓰나’였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의 발언은 정부부처가 꼭 챙겨야 할 ’엄중한 지시’다. 대한축구협회가 국제축구연맹(피파)으로부터 받은 월드컵 출전수당을 적절하게 선수들에게 배분했는지를 놓고는 여전히 논란이 있고, 그렇지 못했다면 당연히 시정돼야 한다. 하지만 시급한 국회 입법과 경제, 안보 현안이 즐비한데 대통령이 그런 문제까지 일일이 신경 쓰는 건 적절한 것일까.
1983년 축구를 좋아했던 전두환 대통령이 “우리나라 축구가 살려면 공격형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 게 모든 신문 1면에 큼지막하게 실렸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제왕적 대통령’의 전형이 바로 이런 모습 아닐까.
대표팀 보상 문제야 세간의 이슈였으니 꼭 바뀌지 않더라도 대통령의 폭넓은 관심과 여유의 한자락을 드러낸 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 한마디에 집권여당의 당대표 선출규정이 십수년 전 과거로 돌아가는 건, 통제를 거부하는 권력의 폐해가 민주주의 전반에 얼마나 심각한 후퇴를 가져올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대통령이 당총재를 겸하는 시절도 아닌데, 대통령 의중이 전해지자마자 국민의힘 지도부는 곧바로 ‘차기 당대표는 당원 투표 100%로 결정한다’는 당헌당규 개정안을 의결했다. 오로지 ‘반윤’인 유승민 전 의원이 당대표가 되는 걸 막겠다는 심산이다. 오랜 정치 경험이 있는 중진은 물론이고 젊은 초선 의원들이 앞장서 이런 퇴행을 손뼉 치며 환영하는 모습은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가 발전을 한 건지 의구심을 들게 한다. 상식 밖의 후퇴와 반동이 손쉽게 이뤄지는 건 무슨 연유에서일까?
자신감에 가득 찬 어투로 주변 참모를 주눅 들게 하는 윤 대통령의 ‘호탕함’과 별개로, 냉정하게 보면 그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취약하다. 대선에서 불과 24만표 차로 간신히 승리했고, 임기 초반임에도 지지율은 이제야 40%를 간신히 넘고 있다. 국회는 여소야대인 데다,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입법 성과를 찾기란 어렵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가족들은 정부 방해를 뚫고 연대를 시작했고, 주말마다 도심에선 ‘대통령 사과, 이상민 장관 사퇴’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진다.
이렇듯 정치적 상황은 위태위태한데도 오직 대통령 한 사람만 전혀 위축되지 않고 더 광범위하고 더 직설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려 든다. 이게 가능한 건, 권력 행사가 통합과 갈등 해소의 방향이 아니라 분열과 진영 대결을 격화하는 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위기가 심화할수록 대통령의 독선은 심해지는 역설이다.
이런 기이한 권력 행사를 우리는 몇년 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서 목격한 적이 있다. 트럼프는 유권자 총투표에선 지고 선거인단에서 간신히 승리했다. 임기 내내 지지율은 50%를 넘은 적이 없고, ‘위험선’이라 불리는 40% 안팎을 맴돌았다. 경제와 외교 등 핵심 정책에서 보인 트럼프의 모습은 유능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그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언론의 예상을 뛰어넘었고, 마음먹은 걸 포기한 적이 거의 없다. 세계적 비난과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와 국경에 장벽을 설치했고, 중국과 대대적인 무역 전쟁을 시작했다. 대통령의 강력한 퍼스낼러티가 정치적 환경의 취약함을 뛰어넘도록 뒷받침한 건, 똘똘 뭉쳐서 공화당을 움직인 강경보수 지지층이었다.
지금 한국의 정부·여당 모습이 그때와 꼭 닮았다. 화물연대 파업을 북한 핵 위협에 비유하고, “노동개혁을 못 하면 정치도 망하고 경제도 망할 것”이라고 극단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대통령의 모습이 그렇다.
문재인 대통령은 퇴임 직전 인터뷰에서 “제가 제왕적 대통령이었나? 왜 제왕적 대통령인가”라고 강하게 반문했다. 5년 내내 가슴에 맺힌 속내를 토로한 것이다. 문 대통령이 ‘제왕적’인지엔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고, 한국이든 미국이든 현대의 대통령제는 경제와 안보까지 확장한 권한 탓에 ‘제왕적’ 속성을 온전히 떨쳐내기 힘들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제왕적 대통령’의 위험성을 지적했던 보수 언론·지식인들이 여당을 수족처럼 부리고 노동자를 적으로 모는 윤석열 대통령에겐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건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을 뛰어넘는, 보기 힘든 ‘기이한 대통령’이기 때문일까.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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