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배도 ‘이정후처럼’ 쉼 없이 달리지 못했다
적어도 KBO리그에서는 누구도 가져본 적 없는 ‘이력서’가 그의 손에 있다.
내년 시즌 이후 포스팅시스템을 통해 미국행을 선언한 이정후(24·키움). 그는 휘문고 졸업 뒤 히어로즈 1차 지명으로 2017년 프로에 데뷔한 뒤 한 시즌도 주춤거림 없이 6년을 달려왔다. 첫 시즌부터 타율 0.324에 179안타를 때리면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더니 공격 각 부문에서 매시즌 상승곡선을 그렸다. 상대적으로 떨어졌던 장타력에 대한 아쉬움도 올해 23홈런을 때리며 상당 부분 해소했다.
국내 무대에서 데뷔해 해외로 뻗어 나간 선배들이 이미 여럿 있지만, 그중 누구도 이정후처럼 처음부터 ‘완성형 타자’로 기복 없이 달리지는 못했다.
‘타격기계로’로 통하는 김현수(LG)도 2006년 두산 육성선수로 선을 보인 뒤 3번째 시즌인 2008년에야 3할대 타율(0.357)로 비로소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고, 올해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이대호(롯데)도 데뷔 4시즌째인 2004년 처음으로 20홈런 고지를 밟으며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또 현역 시절 ‘국민타자’로 통했던 이승엽 두산 감독도 삼성에서 데뷔한 첫 시즌인 1995년에는 타율 0.285에 13홈런 73타점으로 가능성을 보이는 정도였다. 이 감독은 입단 3년차인 1997년에 32홈런으로 야구팬들이 알고 있는 ‘파괴력’을 드러냈다.
이정후의 히어로즈 출신 선배로 빅리그에 진출했던 박병호(KT)와 김하성(샌디에이고), 강정호도 마찬가지. 박병호는 LG를 거쳐 넥센으로 이동해 입단 8년차인 2012년에야 31홈런을 때리며 ‘공인 거포’로 인정받기 시작했고, 김하성도 입단 첫해인 2014년 타율 0.188로 시련을 겪은 뒤에야 성장에 속도를 붙였다. 강정호 또한 현대 유니콘스 입단 뒤 첫 2시즌은 1군에서 내세울 기록조차 남기지 못했다.
이정후가 만 25세가 되는 내년 곧바로 해외 진출 기회를 잡은 것도 데뷔 이후 순탄한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매번 타격감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이정후만의 내적 갈등은 없을 수 없었지만, 드러난 성적만 놓고 보자면 단 한 시즌도 침체된 적이 없었다.
이정후의 힘이자 복일 수 있다. 어린 나이부터 야구에 관한 한 ‘자기주도 학습’을 하면서 스스로 조정 능력을 갖춰온 것이 슬럼프가 오더라도 그 시간을 단축하는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히어로즈만의 문화다. 히어로즈는 상대적으로 다른 구단에 비해 신인 유망주에게 기회의 문이 넓은 곳이다. 덕분에 이정후 또한 데뷔 시즌부터 기회를 확보할 수 있었고, 개막 이후 4월까지 타율 0.306(103타수 30안타)를 기록하며 주전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히어로즈 속사정을 아는 몇몇 관계자들은 히어로즈가 신인 유망주가 입단하면 이른바 ‘메카닉’을 가급적 손대지 않는 것도 언급한다. 신인 유망주의 폼을 조정할 때면 최대한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것인데, 이 같은 문화 역시 입단 때부터 재능이 넘쳤던 이정후에게는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안승호 기자 siwo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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