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탄 사러 갔다가"…이름 없는 상사맨의 '베트남판 수리남'
냉전 시절 무연탄을 수입하러 베트남에 갔던 30대 삼성물산 직원이 현지에 억류돼 있던 한국인 선원 7명 전원과 선박(시에라리온 선적)을 구출한 비화가 발굴됐다. 비밀 해제된 1989년 외무부(현 외교부) 문건들에 '베트남 출장 중인 삼성 직원'이라고 반복적으로 등장한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민간인의 일화다.
적성국인 공산주의 체제 베트남에서 우리 정부의 선원 구출 작전에 투입된 삼성 직원은 당시 나이가 30대 초반에 불과했다. 베트남 당국자들을 만난 뒤 "비용이 과다 청구됐다"는 의견을 내 석방 비용을 깎은 '상사맨'이기도 했다.
21일 머니투데이 더300(the300) 취재 결과 비화의 주인공은 김형기 전 삼성물산 상무(66·사진)인 것으로 파악됐다. 김 전 상무의 구술과 외무부 문건을 통해 다음주 수교 30주년(1992년12월22일 수교)을 앞둔 한-베트남 관계의 비사를 살펴 봤다.
삼성물산이 태국 지사 산하에 베트남 하노이 사무소를 개설하는 형식으로 베트남 판로를 개척하던 때였다. 정부는 무연탄 확보를 위해 삼성물산의 활동을 제한적으로 허락했다.
김 전 상무는 "베트남 지사를 세우려 했지만, 안기부에서 쉬쉬하던 시절이니, '출장자'라는 이름 하에 들어갔다"며 "무연탄을 수입하러 갔다가 흑백TV 수출도 하고, 비료, 철강도 손댔는데 처음엔 그렇게 시작했다"고 했다. 33세였던 '김형기 과장'은 이따금 쥐·박쥐가 출몰하고 베니어합판으로 된 침대가 있는 탕로이호텔 객실에 1인 사무실을 차렸다.
베트남에 한국인이 장기 체류할 경우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체제 안정 목적의 보안교육을 실시하곤 했던 체제 경쟁의 시절이기도 했다. 실제 탕로이호텔에 찾아왔던 북한 외교관은 김 전 상무에게 어디서 들었는지 "삼성에서 왔습네까. 조만간 한 번 보지요"라며 말을 걸었고, 베트남상공회의소에 찾아가서는 "왜 남조선 사람을 사업하게 만드냐"며 언성을 높였다. 김 전 상무가 호텔의 베니어 합판 침대에 누워 '그런데 북한 애들이 혹시 날 잡아가면 어떡할까'하는 생각을 떠올리곤 했던 무렵 사건이 터졌다.
시에라리온 선적 '스탈레트1호'의 선장 이모씨(당시 35세)가 한국인 선원 6명과 함께 베트남에 억류된 것이다. 외무부 문건에 따르면 스탈레트1호는 1989년 10월14일 바다에서 베트남 경비정에 의해 피랍됐다. "영해를 침범했다"는 게 나포 사유였다.
문제는 외무부가 1989년11월18일까지 공식 외교 경로로 나포경위 등 제대로된 정보를 베트남 외교 당국으로부터 전달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수교국과 협상이 지연되면서 정부는 삼성물산을 현지 탐문에 활용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외무부 문건에 '베트남에 출장 중인 삼성 직원'의 행적에 대해 "하노이 접촉선을 통해 방문" "국무원 부장관을 방문" 등 기록이 등장한다. 김 전 상무는 고급 담배인 '555 담배', 빵 등을 챙겨 붕타우시에 억류된 선원들도 직접 만나 사정을 듣고 방콕에 머물던 태국 지사장과도 현장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공유했다.
심지어 김 전 상무는 베트남 측이 요청했던 몸값을 삭감하기까지 했다. 외무부 문건상으로는 스탈레트1호에 청구된 식대·숙박비용 등 제반 비용은 3만7000달러 규모로 한국과 베트남 양측 간 합의됐다. 그런데 원래는 영해 침범 보상금을 포함해 이보다 높은 액수가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김 전 상무는 "철조망을 치고, 수용소에 피랍된 어부들이 많았는데 호텔비 수준으로 청구를 했더라"며 석방 비용을 30% 가량 줄였다고 회고했다. 선주 측이 대금 지불에 합의하면서 선원과 선박은 1990년 2월11일 석방됐다.
정부의 외교력이 닿지 않는 곳에서 민간인이 정부 작전에 투입됐다는 점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을 연상케 하는 측면도 있다. 다만 드라마에 나온 것같은 정부 보상에 대해 들어본 적도, 받기를 바란 적도 없다는 게 김 전 상무의 말이다. 김 전 상무는 "대한민국 일이고 어려운 일이니까, 거기에 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해야된다고 생각했다"며 "과거 상사맨이 오지를 뒤지며, 사업을 발굴하고 시장을 개척한 게 오늘날 우리의 발전에 기여한 것임을 알아주길 바랄 따름"이라고 했다.
김지훈 기자 lhsh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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