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차리는 마음이 돌봄의 정수다

한겨레 2022. 12. 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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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의 의학과 서사]김준혁의 의학과 서사(68)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와 돌봄의 상호성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한 장면. 왓챠 제공

다른 사람을 돌본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여러 답을 내놓을 수 있다. 예컨대 밤새 앓는 자녀를 돌보는 부모의 모습을 그려보는 이가 있을 것이다(비록 어느 쪽에 자신을 대입할 것인지는 다르다 해도).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서 베푸는 봉사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거창하게 그리스 신화의 큐라 여신을 떠올리며, 흙으로 빚은 인간의 소유권을 놓고 제우스 신과 다투는 그의 호방함을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다 좋고 옳은 정의다. 하지만 나는 밥상을 차리는 일을 생각한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한석규, 김서형 두 엄청난 배우가 찍은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를 보고 난 다음, 강창래 선생이 쓴 동명의 에세이를 읽었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보고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면, 책을 읽고 마음 한구석이 동했음을 먼저 고백하는 것도 좋겠다. 아무래도 드라마는 극적 감동을 위해 여러 장치를 넣어 놓은 탓일 거다.

지난번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 다른 집안일에 비해 밥상을 차린 경험이 나는 짧다. 주로 쉬운 요리만 해 왔다. 라면으로 출발해서 파스타, 볶음밥, 생선구이, 삼계탕, 간단한 찌개류 정도가 해본 요리의 대부분이다. 일단 익숙하지 않으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데다가,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미각을 가진 딸에겐 아빠의 볶음밥이 최고라서 그렇다. 모순된 표현이 등장하는 이유는, 사실 아이의 입맛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책을 읽으면서 밥상 차리는 일의 각별함을 생각한다. 물론 이것이 무척 귀찮고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일 때도 잦다는 것을 내 경험에서부터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밥상 차리는 일은 두 사람의 마음이 얽히는 일이다. 차리는 사람의 마음과 먹는 사람의 마음. 다른 사람에게 원체 내 것이라고만 믿었던 자리를 조금 내어주는 것이 삶이라면, 밥상에서 함께 모여 밥을 먹는 일은 사는 일의 핵심 중 하나다. 꼭 영양 보충을 위해서라거나, 한국인은 밥을 먹어야 한다는 둥 상투어를 떠난다 해도.

그리고 그 자리가 점차 지워지고 있기에 나는 밥상 차리는 일을 다시 생각한다. 밥상 차리는 것이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 씀과 그 마음을 소중하게 받는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돌봄의 정수를 잘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점차 밥상이 외주화되고 있는 오늘, 나는 외주화된 우리의 돌봄을, 특히 이미 의료에서 그 어디에도 자리를 찾을 수 없는 돌봄을 겹친다.

왓챠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홍보 포스터. 출처: 왓챠

밥상을 받고 마음을 내준다

멀리 가기 전에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를 소개하고 가야 한다. 책은 (그리고 이를 각색한 드라마는) 암 투병을 하는 아내를 위해 요리를 하고 밥상을 차리는 남편의 요리 일기다. 그 전까지 별로 요리해본 경험이 없을 남편은 아내의 병에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 보려는 마음을 요리로 표현한다. 요리는 실패하기도 하지만, 눈부신 기억을 가족에게 남겨 주거나(‘무항생제 대패삼겹살의 기찬 효능’) 가족이 함께한 기억을 되살리는 역할(‘공간 이동의 기적, 돔베국수’)을 하기도 한다.

대장암 말기인 아내를 위해 남편은 무염식을 준비한다. 무염식이기에 맛이 잘 나지 않으니, 어떻게든 구미를 당기게 하려는 노력으로 매운맛을 더한다(‘잡채의 눈물’). 책 제목에 ‘좀 매울지도 모른다’는 말이 들어가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짠맛 대신의 매운맛은 삶의 강렬함 대신 질환의 신산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가족은 아내, 엄마의 암 투병을 견디면서 삶을 이어간다. 장폐색으로 아내가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상황도 오지만, 마지막까지 아내는 남편이 해다 주는 요리와 주스를 조금이라도 먹으면서 완화 병동의 시간을 보낸다. 남편의 음식을 먹고 아내의 암이 씻은 듯이 낫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내가 떠나간 다음에도.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은 차리는 마음이었는데,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된 것은 먹는 마음이다. 몇 수저 뜨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남편이 차려주는 밥상을 기다리는 아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암세포로 장이 막혀 음식을 더는 넘기지 못하게 되었을 때, 기대치 않았던 수술에서 폐색을 해결해서 다시 밥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앞에 수저를 든 마음은 어땠을까. 나는 그 마음을 생각하면서 돌봄의 상호성, 얼핏 들으면 어불성설인 표현을 마음 한켠에 놓아본다.

돌봄은 원체 단방향의 소통이 아닌가. 돌보는 자가 보살핌 받는 자에게 그저 주는 것이 돌봄의 정밀한 정의라고 한다면 ‘돌봄의 상호성’이라는 표현은 말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에서 그려지는 두 마음의 움직임은, 어느 한쪽의 헌신이라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남편은 아내가 얼마 먹지 못할 것을 알고, 자신의 음식 솜씨가 엄청나지 않다는 것도 알지만 이 밥상이 아내를 조금이라도 기운 나게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요리에 담는다. 아내는? 어떤 고마움을 표했는지 책에 쓰여 있지는 않으나, 말 그대로 밥상 앞에서 “눈물 나게” 고마워하지 않았을까. 마음 쓰는 일은, 말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에게 전해지기 마련이므로. 따라서 돌봄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받는 사람은 그만큼의 마음을 내주어야 한다. 그렇기에 돌봄은 상호적이다.

에세이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표지. 별로 슬픈 이야기를 하지 않는 책인데도 참 슬프다. 아직 책을 이루는 글들이 인터넷에 연재되고 있을 때, 어떤 독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하지만 책은 또 감사하고 값지다. 음식을 통해 서로에게 전해지는 마음의 온기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에. 출처: 알라딘

현대 의학은 왜 밥상을 차리지 않을까

밥상 차리는 일이 엄청 거창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일상에서 지겹도록 반복되는 행위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기본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그 없이, 우리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에게 밥상 차리기는 여러 면에서 돌봄을 잘 보여주는 행위다. 돌봄은 거창하지 않고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이지만, 그 없이 살 수 없는 삶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밥상을 떠나, 다시 내 자리인 의료로 돌아온다. 나는 어쩌면 다소 기계적으로 외치곤 해왔다. “현대 의학은 돌봄을 잊어버렸다.” 그것은 의료인의 나태나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과학이자 기술인 현대 의학이 학적・제도적으로 돌봄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사로서 나의 돌봄이 어떠한 인정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진료하면서 나는 선뜻 내가 환자를 돌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나는 학문에서, 기술에서 뛰어난 의사가 되는 것이 목표였지, 잘 돌보는 의사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현대 의학에선 누구도 밥상을 차리지 않는다. 어디를 돌아보아도, 다들 미쉐린 셰프가 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의과대학도, 학회도, 의료 제도도 마찬가지다. 너무도 당연하고 반복적인 돌봄은 아무도 관심이 없는 것이다. 당연한 것이라서 그런가 보다.

그렇다 보니 이제 돌봄은 엄청 귀한 것이 되었다. 한 달 간병인을 쓰려면 기백만원이 들어간다. 코로나19 이후 입원실 규칙 때문에 가족이나 간병인이 돌아가면서, 또는 여럿이서 환자 옆을 지킬 수 없게 되면서 비용은 더 증가했다. 게다가 우리 의료는 처음부터 술기 중심, 즉 의료인이 환자에게 어떤 치료 행위를 해 주는 것을 ‘의료’라고 정의하여 발전하였기에 돌봄을 신경 쓸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오랫동안 돌봄은 가족, 더 정확히는 가족 내 여성의 부담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의 핵심에는 원래 돌봄이 있었다. (예컨대 19세기까지만 해도 솔직한 의사들은 자신이 환자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은 돌봄이 전부라고 고백하곤 했다.) 이제 과학과 기술이 돌봄의 자리를 대체했기 때문에 돌봄은 필요 없는 무엇이 된 걸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만나 왔던 많은 이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픈 사람 곁 돌봄은 여전히 의료의 정수 그 자체다. 앞으로도 이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과거는 지나갔으나 그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더는 여성이 돌봄의 짐을 온전히 져야 할 이유가 없다. 가족 돌봄은 가능하지 않다. 여성도 가족도 ‘무급 육체노동’인 돌봄에 시간을 들일 여력도, 상황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돌보아야 하느냐는 질문이 돌아온다. 이렇게 물으면 별다른 답이 없다.

우문이다. 질병 앞, 모두는 돌보는 사람이고 보살핌 받는 사람이다. 그 노동에 대한 가치나 무게를 다시 인식하면 되는 일이다. 돌봄은 상호적인 것이기에, 받는 사람은 주는 사람을 인정해 주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따라서 질문을 바꾸자. 누가 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왜 아직 하고 있지 못하는가를 물어보자.

김준혁/연세대 교수·의료윤리학자 junhewk.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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