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눈 덮인 한탄강에 9가지 여울물 소리 [자박자박 소읍탐방]
포천에서 철원으로 이동하면 산은 멀어지고 들은 점점 넓어진다.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드넓은 평원이 눈 닿는 데까지 펼쳐진다. 평균 해발 300m, 철원평야는 강원도에서 가장 큰 들판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4만 년 전부터 12만 년 전 사이 여러 차례에 걸쳐 분출한 용암이 일대를 평평하게 뒤덮었다. 현무암이 풍화된 비옥한 토양은 논농사에 적합해 철원은 오래 전부터 쌀 주산지로 이름을 알렸다.
그 넓은 들판을 적시는 강물은 이상하게도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대지로 스며든 물은 스스로 길을 내고 바위를 깎아 제방이 필요 없는 수십 미터 협곡을 만들었다. 들판보다 훨씬 낮게 흐르는 한탄강이다. 예전에는 상대적으로 접근이 쉽고 풍광이 좋은 곳에 전망대를 지어 먼발치서 은근히 즐겼지만, 지난해 말 순담계곡에 잔도가 놓이면서 한탄강을 여행하는 방식이 확 달라졌다.
협곡 벼랑길 따라 한탄강의 비경 속으로
이른바 ‘철원 주상절리길 잔도’는 순담매표소에서 드르니매표소까지 약 3.6㎞, 한탄강 협곡의 허리로 연결된다. 감히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구간을 여러 개의 철제 다리로 연결한 벼랑길이다. 13개의 교량이 놓였고 3곳의 전망대, 10곳의 쉼터를 갖췄다. 처음에는 아찔하지만 발길을 옮길 때마다 드러나는 비경 속으로 빠져드는 길이다. 지난 16일 순담에서 드르니 방향으로 주상절리길을 걸었다. 눈이 내린 다음 날이라 겨울 강의 또 다른 매력이 더해졌다.
한탄강은 독특한 지형으로 2020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이름을 올렸다. 북한 평강군 장암산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굳으면서 현무암 협곡, 주상절리와 폭포 등 다양하고 아름다운 지형과 경관을 연출한다. 제주도·청송·무등산에 이어 국내 4번째,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질공원으로는 최초다.
입구에서 조금만 걸으면 바로 순담계곡 쉼터 겸 전망대가 나온다. 유유히 흐르던 물줄기가 크게 휘도는 바깥으로 맑은 물이 속도를 늦춰 한탄강에선 드물게 하얀 모래밭이 형성된 곳이다. 바위도 강줄기도 순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는가 했더니, 다른 이유가 있었다. 순담은 순채(蓴菜)가 자라는 연못이란 뜻이다. 열을 내리고 부기를 가라앉히는 데 효과가 있어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약용으로 사용했던 식물이다.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가 이곳에서 요양하며 순담이란 연못을 파고 제천 의림지에서 가져온 순채를 재배했다고 한다.
순담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벼랑으로 이어지는 잔도를 걷는다. 아주 튼튼한 철제 다리지만, 숭숭 뚫린 구멍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강물이 내려다보여 시선은 자연스럽게 먼 곳을 응시한다. 길게 이어진 강줄기 양쪽으로 수직의 바위 절벽이 감싸고 있다.
벼랑길은 곧이어 길쭉한 타원형으로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진다. 순담 스카이전망대다. 절벽에서 강쪽으로 좀 더 돌출됐으니 그만큼 더 아찔하다. 발아래 검푸른 강물이 여울져 흐르고, 물가에 흩어진 크고 작은 바위에는 전날 밤 내린 하얀 눈이 덮였다. 푸른 기운이 감도는 강물에 하얀 물살이 부서진다. 섬세하게 농담을 표현한 한 폭의 수묵담채화다. 아찔하고 두려운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겨울 강의 매력 속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간다.
일부 계단이 있지만 벼랑길은 대체로 강물처럼 순하다. 교량과 쉼터는 지질공원의 특성을 반영해 이름 지었다. 단층교에서는 단단한 지층이 엿가락처럼 휘어지거나 끊어진 모양을 관찰할 수 있고, 돌개구멍교 아래서는 암반을 뚫은 원통 모양의 구멍을 찾을 수 있다. 회색 빛깔의 매끈한 암반지대가 형성된 곳에는 화강암교, 시루떡같이 층층이 돌이 쌓인 모양을 관찰할 수 있는 곳에는 수평절리교가 놓였다. 경사가 급하고 물의 흐름이 빨라 깎아 세운 것처럼 바위가 남아 있는 곳에는 선돌교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수한 세월이 깎이고 갈라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지질의 역사가 비경 속에 녹아 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아홉 가지 여울물 소리
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반영한 작명도 있다. 구리소 쉼터는 한탄강 여울이 가마솥 끓는 소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잔도를 걷는 내내 청아한 물소리가 동행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아홉 가지나 된다고 한다.
쉼터에서 잠시 귀 기울이면 작은 돌 사이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소리, 방울져 떨어지는 폭포소리, 낙폭이 큰 바위 사이로 굽이치는 물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자연의 오케스트라이자 합창이다. 아직 얼지 않은 투명한 물위에서는 청둥오리가 무리 지어 헤엄친다. 넋을 잃고 한없이 여울을 응시한다. 한겨울의 ‘물멍’이다. 바닥이 급경사를 이뤄 물의 흐름이 빨라지고 기포의 흔적이 선명한 곳에는 한여울교, 투명하고 푸른 물 빛깔을 자랑하는 곳에는 쪽빛소 쉼터가 만들어졌다.
‘2번홀교’는 다소 생뚱맞다. 절벽 바로 위에 골프장이 있다. 잔도 위에 보호망을 쳐서 탐방객이 위험하지는 않지만, 강물에 떨어진 숱한 골프공까지 자랑할 건 없을 듯하다.
주상절리길 잔도에서 가장 아찔한 구간에는 동주황벽 쉼터가 있다. 맞은편 절벽이 햇살을 받으면 황금색으로 변한다는 곳이다. 이백의 시 촉도난(蜀道難)은 촉나라로 가는 높고도 험난한 길목을 노래한다. 동주(철원의 옛 이름)의 황토빛 주상절리길엔 즐거움만 가득하다는 의미를 담은 작명이다.
강 건너는 포천 관인면 들판이다. 논바닥에서 낙곡을 주워 먹던 두루미가 이따금씩 떼를 지어 절벽 위로 날갯짓하다 사라진다. 잠시 선경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진다. 두루미를 왜 선학이라 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렇게 한탄강의 비경 속을 헤매다 보면 어느새 드르니 스카이전망대에 닿는다. ‘드르니’는 들르다에서 따온 작명이다. 생각 없이 들렀다가 예상하지 못한 비경과 마주하는 곳이니 일부러라도 들를 만한 곳이다. 맞은편 절벽에 주상절리가 길게 이어지고, 화강암과 현무암이 어우러진 멋진 경관이 펼쳐진다. 잔도는 전망대 부근에서 끝나고, 계단을 조금만 오르면 드르니매표소에서 두어 시간 겨울 강 산책이 마무리된다.
한탄강 주상절리길 입장료는 1만 원, 그중 5,000원을 철원상품권으로 되돌려준다. 지역의 식당이나 편의점, 주유소 등 대부분 업소에서 사용할 수 있다. 드르니매표소에서 차를 세워 놓은 순담매표소까지는 택시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요금은 약 1만 원, 물론 상품권으로 계산하면 된다.
겨울 강을 걷다… 한탄강 물윗길 트레킹
한탄강 지질공원을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태봉대교에서 순담계곡까지 강을 따라 걷는 약 8㎞ ‘물윗길 트레킹’이다. 이름처럼 강물 위에 설치된 부교를 따라 걸으며 한탄강의 비경을 감상하는 색다른 여행 방법이다.
태봉대교와 은하수교 사이 송대소는 한탄강 주상절리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으로 평가된다. 철원평야를 이루며 흐르던 현무암 용암이 좁은 통로를 통과하며 가파른 절벽과 주상절리를 형성한 곳이다. 햇빛의 방향에 따라 붉은색, 회색, 검은색 등 다양한 색상의 암벽이 조화를 이룬다.
조금 더 내려오면 아치형 조형미를 자랑하는 승일교가 있다. 북한에서 공사를 시작해 한국에서 완공한 특이한 역사를 간직한 다리다. 1948년 8월 공산 치하에서 철원 주민들이 노력공작대로 동원돼 시공하다 한국전쟁으로 중단됐고, 1958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완공했다. 바로 옆에 현대식 교량이 생긴 후부터는 보행자 다리로만 쓰인다. 다리 옆 산자락에 조성한 거대한 얼음 절벽이 볼거리다.
하류 고석정은 철원을 대표하는 국민관광지다. 강 중앙에 10m 높이의 기암이 우뚝 솟았고, 그 풍광이 잘 보이는 곳에 정자를 지었다. 신라 진평왕(579∼632년 재위)과 고려 충숙왕(1294∼1339년 재위)이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어 오래 전부터 철원의 명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적 임꺽정이 고석바위의 큰 구멍에서 숨어 지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윗길 트레킹도 입장료 1만 원을 내면, 철원상품권 5,000원을 돌려받는다. 태봉대교와 은하수교, 고석정에 매표소가 있다.
무료인 은하수교 주변만 둘러봐도 ‘큰 여울’ 한탄강을 대충은 살필 수 있다. 한탄강의 수려한 풍광을 별빛에 빗댄 이름으로, 동송읍 장흥리와 갈말읍 상사리를 연결하는 180m의 보행 전용 현수교다. 주탑은 철원을 상징하는 두루미가 커다란 날개를 펼친 모양을 형상화했다. 다리 중간에 투명 유리가 설치돼 있어서 한탄강의 맑은 물줄기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다리 건너 산책로를 따라 낮은 언덕에 오르면 한탄강 위의 평탄대지 철원평야가 바다처럼 펼쳐진다. 장차 전망대가 들어설 자리다.
철원=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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