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野 대치에 ‘예산 지각’… 저소득 취약계층부터 고통받는다
여야의 내년도 예산안 협상이 법정 시한(2일)을 훌쩍 넘겼지만 계속 공전하고 있다. 여야는 20일에도 접점을 찾지 못했다. 문제는 여야의 예산 충돌이 오래갈수록 서민, 지방, 중소기업 등 사회적 약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는 점이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지난 16일 여야 원내대표들을 불러 놓고 “지자체법을 살펴보면 광역단체는 16일, 기초단체는 오는 21일까지 예산안을 마무리해야 한다”며 “그렇게 해야 겨우겨우 (내년) 설 전까지 복지 예산이 지출돼서 ‘세 모녀 사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취약 계층을 지원할 수 있지 않나”라고 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최소한 양심이 있어야지”라고도 했다.
정부 예산안은 통과시킨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자체 예산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한다. 중앙정부가 예산을 배정하면 실제 분배는 광역·기초단체의 집행 계획에 맞춰 이뤄진다. 내년도 예산안은 정부의 지자체 보조금 예산안이 약 82조원이고, 이에 대응한 지방비는 38조원에 이른다. 총 120조원 규모의 국고 보조 사업 집행 시기가 국회 합의에 달린 셈이다. 이 보조금은 대부분 저소득층, 어린이, 다문화, 노인, 청년 일자리 등의 지원에 쓰인다. 여기에 민간 경상 보조(각종 단체 등 지원 예산), 민간 위탁 사업비가 20조원에 이르는 등 민간 지원 사업도 적지 않다. 국회의 한 예산 전문위원은 “이런 보조금 사업이 가장 문제가 된다”며 “정부의 예산 배정이 늦어지면, 일선의 집행 계획에도 차질이 벌어져 공백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미 비상이 걸린 지자체도 있다. 문경·김천 철도는 올해 예비 타당성 조사를 통과한 만큼 내년에 설계를 시작해야 하지만 예산안 처리가 늦어져 관련 지자체들은 공사가 지연될까 봐 크게 우려하고 있다. 반도체 인력 공급을 확대하기 위한 강원도 반도체 교육 센터 설립 사업도 예산 처리에 따라 사업 일정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태풍 피해 복구, 지역의 산업 위기 대응 등은 시점이 중요한데 국회 예산 합의가 안 되니 허탈하다”고 했다.
여기에 경기 침체기엔 저소득층 지원을 위해 각종 사업을 조기에 실행해 1~2월에 예산을 집중 투입할 필요가 있다. 일용직 노동자와 저소득층 등에게 겨울 일자리를 마련해 주면서 경기 부양과 복지 효과를 동시에 챙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예산 합의가 늦어지면서 이런 조기 집행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크다.
이에 대해 한 광역단체의 국비 담당자는 “정부 예산 투입이 계속 늦어지면 지자체 자금만으로 사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사업 진행이 어려울 수 있다”고 했다. 수도권의 한 자치단체 예산 담당자는 “여야 협상 과정에서 (야당이 주장하는) 지역 상품권 등 예산이 증액되더라도 지자체별 배분액과 예산 매칭 비율을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집행이 그만큼 늦어지게 된다”고 했다.
국회가 내년도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못할 경우 ‘준예산’이 실행될 수도 있다. 준예산은 정부가 전년도 예산에 준해 잠정적으로 집행하는 예산으로 ‘최소한의 국가 기능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집행된다. 준예산으로는 서민 생활 지원, 국가 투자 사업, 지자체 국고 보조 사업, 재해 대책 관련 경비 같은 돈을 집행할 수 없다. 정부가 제시한 내년도 예산안의 총지출 639조원 중 재량 지출(정부가 조절할 수 있는 예산)은 약 297조원이다. 준예산이 편성되면 이런 재량 지출이 대부분 막힌다.
여야는 이날도 법인세 인하와 행정안전부 경찰국,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 예산 등 극소수 쟁점을 놓고 평행선을 달렸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와 연락도 안 된다”고 했고, 박 원내대표는 “‘용산 아바타’로 전락한 여당과 협상해봤자 (진전이 안 된다)”고 했다. 접점을 못 찾고 있는 경찰국·인사정보관리단 예산은 5억원으로 전체 예산(639조)의 0.000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선 “조선 시대 ‘예송 논쟁’이 21세기 예산 정국에 살아난 것 같다”는 말까지 나왔다. 조선 시대 서인과 남인이 ‘상복을 1년 입을 것인가, 3년 입을 것인가’ 하는 명분을 놓고 사생결단한 것처럼 여야가 5억원을 ‘정식으로 편성할 것인가(여당), 예비비로 편성할 것인가(야당)’를 두고 벼랑 끝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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