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숲은 이제 동안거에 들어간다
성지곡 수원지를 돌아 이제 반듯한 길로 접어든다. 그리운 선암사까지는 아직 멀다. 숲은 이미 겨울 채비에 들어간 지 오래다. 활엽수들은 잎을 떨구며 빈 몸으로 자신을 다잡고, 초록을 여름 등에 업혀 떠나보낸 풀들은 시든 모습으로 적요에 몸을 내맡긴다. 이제 곧 숲은 조용해질 것이다. 한여름의 당당한 기세와 가을의 번잡을 떠나보내고 자신의 내면을 다잡는 기나긴 명상의 시간으로 들어갈 것이다.
홀로 걷는 숲길은 오붓해서 좋다. 여럿이 함께 걸으면 내면의 나를 만나기가 어렵다. 모든 걸 아낌없이 내주는 숲의 은혜로움도 느끼지 못하고, 메마른 감정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새소리와 바람의 손길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숲이 저렇게 내면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 동안거에 들어가듯, 나도 그동안 닫아두었던 빗장을 풀고 숨죽이고 있던 나를 만나 진솔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겨울밤이 긴 까닭을 내 나름대로 뜻풀이해 본다. 숙면한다고 해도 눈을 뜨면 아직도 깜깜 새벽인 네 시 무렵이다. 해가 뜨려면 족히 세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옷을 단단하게 입고 거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별의별 생각으로 만리장성을 쌓는다. 자연스럽게 내면의 나를 만나게 된다. 한 해가 부질없이 지나가 버렸다는 숙연함과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설렘이 교차하며 착잡한 심사에 젖는다. 베란다 밖 어둠을 응시하다 문득 건너편 동의 가로등을 발견한다. 추위와 외로움을 잘 참아내고 있다. 뒤이어 그 옆 동 어느 집에 불이 켜진다. 누군가 신새벽 나처럼 홀로 깬 사내를 생각하며 묘한 동류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조금은 덜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잠 깨어 두어 시간 동안 나를 만나는 시간은 웅숭깊은 시간이다. 지금 숲의 헐벗은 나무들도 로마 황제처럼 자신을 만나는 명상록을 쓰고 있을 텐데, 나라고 엄벙덤벙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지나간 시간은 지나간 그대로 두는 것이 맞다. 앞으로 남은 생이 문제이다. 이룬 건 별 없다 할지라도 끝이 지저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다잡는다. 수십 권의 책을 내긴 했지만, 독자들 기억에 불멸의 인장을 찍을 수 있는 책이 하나도 없다 생각하니 갑자기 낯이 화끈해진다.
젊을 땐 낮이 긴 여름이 좋더니 나이 드니 밤이 긴 겨울이 좋아진다. 무성한 숲보다는 듬성듬성 나무가 서 있는 비어있는 숲이 좋다. 비어있다 해도 사실은 속이 꽉 차 있는 것이 겨울 숲이다. 애써 가난을 자처하고 자신을 만나는 동안거에 든 그 숲속에서 많은 내밀한 속삭임을 듣는다.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 소리도 “내 탓이오, 내 탓이오”라고 새겨듣는다. 홀로 비어있어도 내면은 들끓고 있을 게 분명하다. 적요 속에 묻혀 외로워 보여도 실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숲은 푸른 수액을 힘차게 끌어올리며 향기로운 꽃들을 느낌표처럼 터뜨릴 봄을 생각하며 인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밤이 길고 추워도 애써 참는 까닭이 있다. 살기 바빠 생각을 잊고 살아도, 뒤처지기 싫어 내면의 나를 만나기 어려워도, 밤이 긴 겨울에는 생각할 시간과 나를 만나는 기회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홀로 잠 깨어 우두커니 앉아 소리 없이 울어보는 것도, 한 편의 비극을 감상하는 것처럼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 안성맞춤이다. 우리가 언제 참선하는 수도승처럼 생각을 만나고 나를 만난 일이 있었던가. 우리가 언제 정신 나간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어본 일이, 또 언제 소리 없이 목 놓아 울어본 일이 있었던가.
땀이 송송 맺힌 이마를 닦다 보니 어느새 선암사 들머리다. 옅은 향내와 목탁 소리가 너른 품으로 맞아준다. 땀을 식히며 주위 숲을 휘둘러본다. 문득 얼마 전에 시청했던 휴먼 다큐 ‘그 숲에 현자가 산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바위틈으로 내민 춘란 한 무더기를 존대어로 맞는 숲의 현자 B 씨의 모습이 떠오른다. 숲의 겨울 채비를 하는 그의 모습이 숲 그 자체였다. 겨울이 가기 전에 동안거에 든 숲도 볼 겸, 그 숲속 어느 한 나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그를 찾으러 가 봐야 할 것 같다, 그 숲에서 겨울의 단단한 결기를 배워야겠다. 숲의 진경은 겨울 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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