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월회의 행로난] 민주, 민이 주인? 아니면 민의 주인?
민주는 ‘데모크라시(democracy)’의 번역어다. 근대 이래 서양문명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널리 퍼진 말로 “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데모크라시의 번역어로 쓰이기 전에 이미 민주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었다.
춘추시대 역사를 서술한 <춘추좌전>에는 노나라 양중이 제나라에 갔다 돌아와서 노나라 군주에게 귀국 보고를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제나라 군주가 말이 게으르고 경박하다고 아뢨다. 그러자 곁에 있던 장문중이 “민주가 게으르고 경박하면 반드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민주는 제나라 군주를 가리킨다. 또 이런 기사도 실려 있다. “조맹은 오래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말은 참으로 게으르고 경박하여 민주답지 못했습니다.” 노나라의 목숙이 맹효백에게 진나라에 다녀온 후 진나라의 집정인 조맹에 대하여 한 말이다. 여기서 민주는 한 나라의 정사를 총괄하는 집정을 가리킨다. 집정은 훗날의 재상에 해당된다.
이처럼 민주는 한자권이 서양문명과 전면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민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통치계층의 최상층에 위치한 군주나 집정을 가리켰다. 데모크라시라는 뜻의 민주와는 상반된 의미로 사용됐음이다. 다만 이들 민주에게는 “민을 국가의 근간으로 삼는다”는 ‘민본’이란 이념을 실현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민의 주인은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민을 잘 섬기는 존재라는 이념이었다. 그러나 민본은 데모크라시로서의 민주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민본 이념이 잘 구현되어 민이 안정되고 풍족하게 살게 된다고 해도 민은 여전히 통치의 대상일 뿐 결코 국가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 민을 국가 통치의 주체로 사유한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본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으로 긍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민본조차 실현하지 못하는 민주들이 용납될 수 있는 여지는 애초부터 희박했다.
어느덧 세밑이다. 이맘때면 여기저기서 “한 해 동안 내가 사랑했던 음악은?” 식으로 한 해를 정리하기도 한다. 하여 이런 물음을 던지고 싶다. “올 한 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변질되고 왜곡된 것은?” 필자의 답은 민주다. 민이 국가의 주인임을 가리키던 말이 자신들이 민의 주인이라며 행세하는 말로 전락되었으니 말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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