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순 칼럼] 좌파 바겐세일

한겨레 2022. 12. 20.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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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칼럼]절대권력을 위해 당헌을 뜯어고치는 양당엔 진정한 보수나 진보가 설 자리가 없다. 포장지만 그럴듯한 양당의 좌우파 코스프레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국민이다. 재건축할 강남 아파트도 없고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벌지 못하고 소득세·종부세 감면으로 혜택을 볼 아무것도 없는 보통 사람들.
지난 10월22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에서 자유통일당 등이 개최한 ‘자유통일 주사파 척결 국민대회’가 열렸다. 연합뉴스(왼쪽 사진). 같은 날 저녁 촛불행동 주최로 서울 시청역 일대에서 열린 제11차 전국집중촛불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이 손팻말과 촛불조명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좌파 척결 의지를 선명하게 내걸었다. 문재인 정부를 “80년대 좌파 사회혁명 이념으로 무장된 운동권들의 정권”이라고 규정하고 “공산당 좌파 혁명이론에 빠져 있는 이 소수에게 대한민국의 정치와 미래를 맡겨서 되겠냐”고 호통쳤다. 지금도 이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 최근 화물연대 파업 후속 조치에 관해 언급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깨려는 세력과는 절대 타협해선 안 된다”고 재차 강조했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이나 공영방송 개혁을 주장하는 언론인들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국가 혁명세력’으로 규정한다. 대화와 타협의 상대가 아니라 배제와 타도의 대상이다.

너무 나갔다. 하나씩 짚어보자. 첫째, 한국의 좌파는 공산주의자와 동의어가 아니다. 사상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헌법 아래에서 어떤 사상을 가진다는 것만으로 배제와 척결의 대상이 되는 게 타당한지는 논외로 치자. 2022년 한국의 진보세력 가운데 공산주의를 내면화하고 옹호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시민운동에 몸담고 있는 나로서는 지금껏 그런 이를 본 적이 없다.

둘째, 모든 좌파가 친민주당은 아니다. 진짜 좌파라면 민주당에 대해 우호적일 수만은 없다. “층수, 용적률, 안전진단을 대폭 완화해 인허가가 신속하게 나게 하고 사업 기간도 대폭 줄이겠다”고 재개발 규제 완화 정책을 당론으로 내세우는 게 좌파정당인가? 부자 감세에 대항해 서민 감세를 하겠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효과도 미미한 저소득자 세금 감면을 끼워 넣는 대신 대규모 감세안을 수용하는 게 좌파정당인가? 주식 투자로 연 5천만원 이상 번 이들에게 소득세를 부과하자는 금융투자소득세 시행을 2년 유예하자는, 정부 여당과 똑같은 주장을 하는 게 좌파정당인가? ‘증세를 통한 복지재원 확보’는 프랑스혁명 이론가인 토머스 페인 이후 좌파의 핵심 키워드다. 민주당은 왼쪽이라기엔 너무 위쪽에 있다.

셋째, 좌파는 척결 대상이 아니다. 좌파와 우파는 프랑스혁명 이후 정치적 진보와 보수를 상징하는 용어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의 왼쪽만 없애는 게 가능한가? 좌우가 없는 창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열린 문 없이 모두가 동색인 사회, 우린 그것을 폐쇄된 전체주의라고 부른다.

상식적으로 따져보면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인데, 개나 소나 좌파라고 몰아붙이니, 진품은 없고 짝퉁만 즐비한 ‘좌파 바겐세일’ 현장을 보는 것 같다. 박근혜 정부 때 한창 유행하던 ‘종북좌파 마녀사냥’이 별 재미를 못 보고 끝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좌파 타령이 권력자들에게 애용되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우선 대통령과 국민의힘 쪽 손익계산서를 보자. 좌파 바겐세일을 통해 이들이 얻는 이득은 짭짤하다. 모든 좌파는 불살라 없애야 하는 악령, 존중하거나 보호할 가치가 없는 반국가세력이기 때문에, 좌파 척결 의지를 불태우면 자동으로 ‘정의의 수호자’가 된다. ‘대한민국의 자유와 정의를 지킨다’는 신성불가침의 망토를 걸침으로써, 갈등세력과 대화를 거부하고 독주해도, 불손한 세력을 깡그리 무시해도 거리낌이 없다. 불통의 독불장군을 독야청청한 선지자로 만드는 둔갑술의 여의봉이다.

더불어민주당도 좌파 바겐세일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좌파라고 낙인찍히는 걸 억울해하긴 해도 스스로 좌파라고 선언하진 않는다. 그래도 자동으로 진보의 사령탑 행세를 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를 비판하려면 민주당 우산 아래로 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권엔 두개의 옵션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당 룰을 따르라고 한다. 당대표의 용퇴를 주장하거나 기득권 586 교체를 주장하는 건 역린을 건드리는 배신으로 간주한다.

절대권력을 위해 당헌을 뜯어고치는 양당엔 진정한 보수나 진보가 설 자리가 없다. 포장지만 그럴듯한 양당의 좌우파 코스프레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건 국민이다. 재건축할 강남 아파트도 없고 주식 투자로 5천만원 이상 벌지 못하고 소득세·종부세 감면으로 혜택을 볼 아무것도 없는 보통 사람들.

초원을 달리는 야생마의 시야는 350도라고 한다. 그래서 레인 안에서만 달리라고 경주마에게 눈가리개를 씌운다. 좌우의 간격은 종잇장 차이다. 정작 중요한 건 레인 밖에 있다. 평균 자산 31억5천만원, 50대 남성이 주를 이루는 국회의원들 눈엔 보이지 않는 레인 밖 사각지대, 기울어진 운동장이든 비뚤어진 운동장이든 아예 운동장 안에 진입조차 못 한 투명인간들의 삶은 거기에 있다. 그러니 제발 국민의힘은 보수를, 민주당은 진보를 함부로 참칭하지 마라. 눈가리개를 거부하는 국민의 열린 시야를 두려워할 줄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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