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가 무기가 되는 시대
[세상읽기]
[세상읽기] 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세계화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2000년대 전후로 활발했던 양자 간 자유무역협정(FTA)은 이제 시들하다. 최근 몇년 새 지역 또는 가치사슬로 엮인 세개 이상 국가가 대단위 통상협력을 맺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2018년 발족한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과 2020년 발족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이 대표적인 예다. 전통적 의미의 무역협정에서 진일보한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는 지난 5월 공식 협상을 개시했다. 미국이 한국, 일본, 대만에 제안한 ‘칩4동맹’ 역시 반도체라는 특정 산업을 둘러싼 이해 당사국들의 이합집산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역 블록화’의 심화는 강대국 간 전략경쟁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은 자국 첨단산업의 기술경쟁력과 일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반도체과학법, 인플레이션감축법 등 법안을 연달아 제정했다. 또 아이피이에프, 칩4동맹 등 외교통상정책을 통해 노골적으로 중국을 고립시키고 있다. 지난 6월 발효된 ‘위구르강제노동방지법’에도 인권탄압을 구실로 중국산 상품 수입을 제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유럽연합(EU)도 예외는 아니다. 미-중 무역갈등 심화, 다자주의 약화, 팬데믹으로 인한 자국 우선주의 대두 등 급변하는 통상 환경 속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나름의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지난해 2월 발표한 ‘신통상전략’이 대표적이다. 정보통신, 생명, 의료, 방위, 우주항공 등 역내 전략산업의 대외 의존도를 낮추고 자국 기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여러 지원정책을 제시했다. 자유무역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유럽과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과는 통상협력을 강화하되 그렇지 않은 국가와는 거리를 두기로 했다. 예컨대 유럽연합은 ‘탄소국경조정제도’를 통해 역내 환경 기준에 못 미치는 외국 수출기업에 불이익을 주고, ‘역외보조금 규제법’을 통해 정부 개입으로 인한 불공정 경쟁의 여지를 줄인다. ‘기업의 지속가능성 실사 지침’을 통해 환경, 인권 규범을 따르지 않는 제3국 기업이 유럽연합 안에서 사업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미국과 유럽의 최근 움직임으로 미뤄 볼 때 무역과 가치를 연계하는 흐름은 앞으로도 지속할 것으로 전망된다. 근래 체결된 양자 및 다자 무역협정에는 노동과 환경에 관한 별도 규범이 점점 더 엄격한 형태로 포함되고 있다. 기존 한-미 자유무역협정, 한-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 등에도 노동장이 별도로 구성돼 있다. 우리가 가입을 추진하고 있는 시피티피피 제19장은 국제노동기구(ILO)가 규정한 주요 노동의무를 인용했다. 또한 아이피이에프 무역 분야에도 노동 및 환경 이슈가 핵심 의제로 포함돼 논의 중이다.
강대국 위주의 세계 질서 재편에 가치가 무기로 사용되는 형국이다. 노동, 인권, 환경, 자유 등 그럴듯한 명분은 사실상 무역장벽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임금 인상, 근로조건 개선, 안전기준 강화 등을 통한 노동 환경 개선은 인력고용 비용을 증가시켜 결국 기업의 가격경쟁력을 약화한다. 그 반사이익은 자연히 교역 상대국이 얻는다. 가치연대의 이면에는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냉혹한 외교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고 강대국이 내세우는 가치가 껍데기나 미끼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기후변화는 실존하는 위기이고 모든 국가의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일은 노동자와 소비자 모두를 위해 중요하다. 근로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결사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들은 원하지 않는 노동을 하지 않을 권리까지 보장받아야 한다. 그들이 내세운 무역장벽으로서의 규범은 곧 우리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는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지키고 지구촌 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선진국이 내세우는 자유와 인권과 노동과 환경의 가치를 따라잡기에 급급하기보다 그 가치가 실현되도록 먼저 나서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최근 화물연대 파업을 다루는 행태나 연장근로를 장려하는 움직임을 보면 정부의 말이 잘 지켜질지 의문이다. 노동자들의 파업이 입힐 손해를 강조하는 대신, 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는 세계 경제 질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할 때의 피해를 가늠해봐야 하지 않을까. 가치가 무기가 되는 시대에, 우리가 앞으로 어떤 무기를 갖춰갈지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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