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동굴에서 법기술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법을 다루는 자들의 해석 행위가 신의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밝은 헤르메스의 행위가 아니라 속이고 감추고 덮어씌우는 어두운 헤르메스의 행위가 된다면, 법을 다루는 자들에 대한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해석학(hermeneutics)의 어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hermes)에게 이른다. 그리스 신화는 헤르메스가 신들의 제왕 제우스와 거인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헤르메스는 날개 달린 신발 ‘탈라리아’를 신고 날개 달린 모자 ‘페타소스’를 쓰고 뱀 두마리가 서로 휘감고 있는 지팡이 ‘케리케이온’을 들고 날아다닌다. 헤르메스의 고유한 특징은 ‘건너감’이다. 날개를 장착한 헤르메스는 천상에서부터 지하에 이르기까지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와 저승의 세계를 자유롭게 오간다. 헤르메스는 죽은 인간을 저승으로 안내하는 영혼의 인도자이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신들의 사자다.
신의 뜻은 인간에게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다. 적실한 사례가 델포이 신전의 무녀 피티아다. 망아의 상태에서 신의 예언을 그대로 되뇌는 무녀의 말은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다. 뒤엉킨 실타래 같은 말을 무녀 곁에 있는 신관이 받아 적절한 말로 옮겨줘야만 인간의 이해 범위 안에 도달한다.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통역해주는 과정이 없다면 신의 뜻은 인간에게 와 닿지 못한다. 신의 뜻은 번역되고 해석돼야 한다. 바로 여기에 개입하는 신이 헤르메스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전령으로서 신의 말이 인간의 말로 잘 옮겨지도록 돕는다. 통역자의 신이 헤르메스다. 통역은 해석이다. 여기서 해석학이 태어났다. 헤르메스는 해석하는 이들의 신, 해석학의 신이다.
우리 인간의 삶은 모조리 해석으로 이뤄져 있다. 글자와 문헌을 해석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거리의 신호를 읽고 간판의 그림을 읽는 일, 사람의 마음을 읽고 사건의 의미를 읽는 일이 모두 해석이다. 해석을 거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삶의 바탕에는 해석학이 놓여 있다. 해석학은 어둠을 밝혀 사물과 사태가 본디 모습대로 드러나게 해주는 이해의 불빛이다. 세상사 모든 것들을 해석해 인간을 어둠에서 끌어내 밝음으로 이끌어주는 것, 이것이 헤르메스의 일이고 해석학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헤르메스에게는 이런 밝은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헤르메스의 다른 얼굴을 이 신의 탄생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 헤르메스는 깊은 산중 동굴에서 태어났다. 제우스의 아들답게 헤르메스는 태어난 바로 그날 스스로 강보에서 빠져나와 동굴 밖으로 걸어나간다. 갓난아기이지만 갓난아기가 아니다. 헤르메스가 동굴 밖에서 처음 발견한 것이 느릿느릿 기어가는 거북이였는데, 거북이의 등딱지를 보고 그럴듯한 생각을 해낸다. 등딱지에 줄을 달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리라(수금)를 만든 것이다. 헤르메스가 발명한 리라는 나중에 오르페우스에게 전해진다. 오르페우스가 리라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 초목과 짐승들도 감동해 숨을 죽였다.
더 대담한 일은 그다음에 벌어진다. 동굴 밖으로 여행을 떠난 헤르메스는 이복형 아폴론이 소를 치던 땅에 이른다. 아폴론은 헤라를 도와 곰가죽 끈으로 제우스를 묶은 죄로 벌을 받아 인간 세상에 귀양 와 있던 터였다. 어린 헤르메스는 아폴론 모르게 암소 50마리를 훔쳐 나온다. 그러고는 소떼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보지 못하도록 소들을 뒷걸음질로 걷게 해서 숲속 어두운 곳에 숨겨놓는다. 도둑질을 끝낸 헤르메스는 동굴로 돌아가 갓난아기의 강보에 들어가 숨는다. 모든 것을 감쪽같이 해치운 것 같지만, 아폴론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소들이 사라진 것을 뒤늦게 안 아폴론이 화가 나서 헤르메스의 동굴로 달려간다. 강보에 싸인 이복동생에게 ‘소를 훔쳐 몰고 간 게 너 아니냐’고 따진다. 헤르메스가 ‘소를 훔쳐 몰고 간 적 없다’고 맹세한다. 헤르메스의 말은 교묘하다. 헤르메스가 소들을 ‘뒷걸음질로’ 걷게 했기 때문에 ‘몰고’ 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말 그대로만 보면 거짓이 아니지만, 전체로 보면 궤변이다. 바로 이 순간, 헤르메스는 기만과 간계의 신, 도둑질과 거짓말의 신이 된다. 한번 시작된 헤르메스의 속임수와 도둑질은 멈추지 않는다. 아폴론과 승강이를 하는 중에도 헤르메스는 아폴론이 흥분한 틈을 타 활과 화살통을 훔친다. 18세기에 독일에서 나온 <신화사전>은 ‘훔치는 헤르메스’를 이렇게 묘사한다.
“헤르메스는 태어나자마자 포세이돈의 삼지창을 훔치고 아레스의 칼집에서 칼을 훔쳤으며, 헤파이스토스에게서는 대장간의 집게를 훔치고 제우스에게서는 왕홀을 훔쳤다. 헤르메스가 만일 불을 두려워하지 않았더라면 제우스에게서 번개도 훔쳤을 것이다. 헤르메스는 태어난 바로 그날 에로스에게 씨름을 하자고 덤벼 다리를 걸어 넘어뜨림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 아프로디테가 기뻐하며 헤르메스를 품에 안자 어린 헤르메스는 아프로디테의 허리띠를 훔쳤다.”
헤르메스는 속이고 훔치는 신, 감추고 꾸미는 신이다. 교묘한 말로 궁지를 빠져나가기에 달변의 신이기도 하다. 밝은 헤르메스는 신들의 말을 전하고 낯선 언어를 친숙한 언어로 옮기고 캄캄한 세상을 해석의 빛으로 밝히는 신이지만, 어두운 헤르메스는 백주에 남의 것을 탈취해 어둠 속에 숨기는 신이고 주인의 추궁을 거짓 맹세로 받아치는 신이다. 헤르메스 신화에는 밝음과 어둠 사이 친밀성이 암시돼 있다. 밝은 것은 밝은 것으로만 있지 않다. 상황이 바뀌면 밝음은 어둠으로 뒤집힌다. 숨은 뜻을 훤히 드러내주는 해석의 신이 진실을 묻어버리고 뒤틀어버리는 기만의 신으로 바뀌는 것이다. 해석의 기술은 너무 쉽게 은폐의 기술, 왜곡의 기술이 된다. 이런 일이 법의 영역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법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법은 욕구(orexis) 없는 지성(nous)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은 ‘왜 법이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가, 법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를 이야기하는 중에 나온다. 법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 찾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법을 세워 그 법으로 인간의 무분별한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을 뜻한다. 법은 지성, 곧 보편적 이성의 총화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을 통치자로 세우더라도 법이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 욕망이 제어되지 않으면 최선의 인간들도 끝내 일그러지고 망가진다. 법이 없다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러므로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가려면 통치자의 사적 욕망이 끼어들게 해서는 안 된다. 또 그렇게 하려면 법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때의 법을 가리키는 말이 ‘욕구 없는 지성’이다. 욕구가 배제된 지성이 나라를 다스릴 때 그 나라를 참된 법치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법치란 인간의 욕구, 곧 사사로운 욕망이 개입되지 않은 채 보편적 이성 자체가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법은 사람이 아니므로 법이 나라를 다스리려면 법을 다루고 지키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사람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법률의 수호자, 법률의 봉사자’라고 부른다. 법이 욕구 없는 정신이 되려면, 법을 수호하고 법에 봉사하는 자들이 사사로움을 누르고 법의 정신을 구현해야 한다.
그 법의 영역은 헤르메스의 영역, 곧 해석의 영역이다. 법원의 판단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행위를 범법으로 규정할 것인지, 수사할 것인지 말 것인지,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부터가 해석이다. 그런데 만약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자들이 탐욕과 야심의 하수인이 되어 법의 정신을 왜곡한다면 어떻게 될까? 법을 다루는 자들의 해석 행위가 신의 뜻을 바르게 전달하는 밝은 헤르메스의 행위가 아니라 속이고 감추고 덮어씌우는 어두운 헤르메스의 행위가 된다면, 법을 다루는 자들에 대한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법이 정적을 공격하는 부당한 무기가 될 때, 법이 반대자를 치는 날카로운 도구가 될 때, 그 법은 법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암수가 된다. ‘욕구 없는 정신’으로서 법은 사라지고 ‘정신 없는 욕구’만 날뛴다. 권한을 남용해 있는 죄는 묻어버리고 없는 죄는 만들어낼 때, 그 부당행위에 법원이 가담해 법의 정신을 희롱할 때, 법은 있되 법이 없는 무법 상태가 벌어진다. 법을 다루는 법기술자들이 법의 적이 된다. 우리는 국가권력이 고문과 조작으로 범법자를 만들어내고 판사가 그렇게 만들어진 범법자에게 정찰제 가격을 매기듯 형을 선고하던 가혹하고 끔찍한 시대를 지나왔다. 그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법기술자들이 파놓은 이 어두운 헤르메스 동굴에서 벗어나야 한다.
고명섭 | 책지성팀 선임기자
<하이데거 극장-존재의 비밀과 진리의 심연>(1, 2), <니체 극장-영원회귀와 권력의지의 드라마>, <즐거운 지식>, <광기와 천재-루소에서 히틀러까지 문제적 열정의 내면 풍경>, <지식의 발견-한국 지식인들의 문제적 담론 읽기>,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썼다. 카이로스는 때·시기·기회를 뜻하며 현재를 밝히는 순간의 섬광을 가리킨다. 카이로스의 눈으로 철학·사상·역사를 포함한 인문학을 탐사하며 우리 시대와 대화한다.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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