갭투자→유령법인 매도→잠적…세입자 울린 ‘빌라왕’ 수두룩

박세준 2022. 12. 2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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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의심 106건 수사 의뢰
피해자 69% ‘2030’… 수도권 집중

40대 임대업자 3명은 A빌라의 전세보증금으로 B빌라를 사고, B빌라의 전세금으로 C빌라를 사는 식으로 서울 소재 빌라를 다수 매입했다. 이들은 보증금 반환이 어렵게 되자, 자신들이 소유한 모든 빌라를 유령 법인에 매도한 뒤 잠적했다.

서울에 빌라를 신축한 건축주 D씨는 브로커 E씨를 통해 이른바 바지사장인 F씨에게 건물을 통째로 넘겼다. 브로커는 이자지원금을 미끼로 세입자들에게 높은 보증금의 전세계약을 유도했다. 계약 기간이 끝난 뒤 무자력자(자금력이 없는 사람)인 F씨가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아 세입자들이 피해를 보게 됐다. 1000채가 넘는 집을 갖고 있다가 지난 10월 돌연 사망하면서 수백명의 피해자를 양산한 ‘빌라왕’ 김모씨와 비슷한 사례다.
국토교통부가 전세사기 의심 거래 106건에 대해 20일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사진은 이날 서울 시내 다가구와 빌라촌의 모습. 최상수 기자
국토교통부는 지난 9월 말부터 접수한 이 같은 전세사기 피해상담 사례 687건 중 106건을 선별해 1차로 경찰청에 수사 의뢰한다고 20일 밝혔다. 국토부는 서울 강서구에 설치한 전세피해지원센터에서 각종 피해 사례를 접수한 뒤 피해자가 다수이거나 공모가 의심되는 건을 분류했다.

국토부가 수사 의뢰하는 106건에 연루된 법인은 10개, 혐의자는 모두 42명이다. 빌라왕 김씨의 사례처럼 무자력자를 내세운 전세사기 의심 사건 16건도 포함됐다.

혐의자는 임대인이 25명으로 가장 많았고, 공인중개사(6명), 임대인 겸 공인중개사(4명), 모집책(4명), 건축주(3명) 등이 뒤를 이었다. 연령별로는 40대가 42.9%로 가장 많았고, 50대는 23.8%, 30대가 19.0%였다. 거래 지역은 서울(52.8%), 인천(34.9%), 경기(11.3%)가 대부분이었다. 피해자는 20대(17.9%)와 30대(50.9%) 젊은층의 비중이 컸다.

국토부는 1차 수사 의뢰 사건에 포함되지 않은 나머지 피해 사례도 추가로 분석을 거쳐 수사 의뢰를 할 예정이다. 내년 1월까지 진행하는 범정부 전세사기 특별 단속도 2월 중 경찰청과 공동으로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이후에도 전세피해지원센터에 접수되는 피해 사례를 분석해 2개월마다 경찰청에 수사를 의뢰하기로 했다.
아울러 국토부는 전세사기를 비롯한 집값 담합 등 시장 교란행위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기존의 부동산거래분석기획단을 부동산소비자보호기획단으로 개편하기로 했다. 개편된 기획단은 부동산 거래 전 단계에 대해 모니터링과 단속을 강화할 계획이다. 매물 단계에서는 허위매물과 집값 담합을 모니터링하고, 등기 단계에서는 부동산 거래신고 후 미등기된 사례를 조사해 허위거래를 단속한다. 임대차 단계에서는 전세사기 등 위법행위를 단속할 예정이다.

범정부 차원의 전세사기 전담 지원반도 구성된다. 법무부와 국토부는 이날 ‘전세사기 피해 임차인 법률지원 합동 태스크포스(TF)’의 첫 회의를 열고 향후 운영방향 등을 논의했다. TF는 빌라왕 사건 피해자들을 원스톱으로 지원하는 한편, 전세사기에 대한 종합적인 제도 개선 방안을 내놓을 계획이다.

TF엔 두 부처 외에 경찰청과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대한법률구조공단,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법무부 법무실장(직무대리)과 국토부 주택토지실장이 TF 팀장을 함께 맡기로 했다.

TF는 빌라왕 피해자들이 보증금을 신속히 돌려받을 수 있도록 하고, 법률 상담과 소송 지원 등 법률 지원을 위한 방안을 논의해 추진할 계획이다. 또 피해자들의 건의 사항을 듣고 필요한 제도 개선 및 지원 방안도 논의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에 속도를 내는 한편 새로운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예방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예림 부동산 전문 변호사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금액을 잃은 이들이 너무 많을 것”이라면서 “대출을 연장하고, 법률적 다툼이 있다 하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지급하는 방향으로 구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성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국장은 “여러 전세제도들이 생겼지만 늘 세입자들이 ‘깡통전세’ 등의 피해를 봤다”면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법적 장치를 강화해야 했지만 미비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전세금을 떼이지 않도록 전세보증금을 반환하는 보험상품에 의무적으로 가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저가 빌라의 세입자는 전세보증 수수료를 부담하는 것조차 부담이 될 수 있는 만큼 이를 집주인이 부담하거나 국가가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HUG의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최황수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HUG의 전세보증으로 대출을 받는 사례가 많지만 무분별하게 이뤄진 경우가 많고 그만큼 피해액도 커지고 있다”며 “HUG에서 하는 전세대출 심사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거래가 발생하면 주변 시세 등에 대한 모니터링도 면밀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인천시 미추홀구청에서 열린 전세사기 피해 근절을 위한 관계 기관 간담회에서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 정부는 지난 9월 집주인과 세입자의 정보 비대칭성을 해소하기 위해 자가진단 안심전세 애플리케이션(앱)을 출시해 적정 전세가격과 악성 임대인 명단 등을 공개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전세사기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지난달에는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납세증명서를 요구하고 세금 체납 내역을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기도 했다. 집주인의 국세·지방세 체납으로 세입자의 우선순위가 밀리면서 보증금을 떼이는 사례를 미연에 막는 차원이다.

박세준·박진영·장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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