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를 실패자로 만드는 교육, 이게 최선입니까 [아침햇발]
[아침햇발]
이종규 | 논설위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다 보면 대학 이름이 큼지막하게 새겨진 점퍼(일명 ‘과잠’)를 입은 학생들이 종종 눈에 들어온다. 중학생들도 줄줄 암송한다는 ‘대학 서열 피라미드’에서 중간 이상은 되는 대학들이 많았던 것 같다. 아이 둘 키우는 아빠의 오지랖일까? 그 점퍼를 볼 때면 간혹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혹시 지하철 같은 칸에 ‘이름 없는’ 대학 재학생은 없을까? ‘자랑스럽게’ 내보인 자기 학교보다 대학 피라미드상 서열이 높은 학교 학생이 타면 움츠러들지 않을까?
‘과잠’을 단지 패션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서열주의가 투영된 ‘구별 짓기’ 문화의 하나로 해석하는 게 더 현실에 부합할 듯하다. 끊임없이 줄을 세우고 구별을 짓는 사회에선 우월감보다는 좌절감을 느끼는 이들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아래로 갈수록 더 넓어지는 게 피라미드의 속성이다.
물론 학생들의 ‘인정 욕구’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치열한 경쟁을 뚫은 이들에게만 그 점퍼를 입을 자격이 주어지니, ‘저, 이 대학 다녀요’라고 뽐내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는가. 그 ‘간판’을 얻으려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마저 든다. 어쩌면 그들은 어릴 때부터 경쟁을 내면화하도록 강요해온 사회시스템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요즘 젊은 세대의 앙상한 능력주의와 공정성에 대한 강박을 나무라는 목소리가 많지만, 그것 또한 경쟁 중독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학 서열을 매기는 데 있어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은 압도적인 권위를 자랑한다. 대입 시즌이 끝나면 그해 입시 결과(일명 ‘입결’)를 놓고 입시 사이트 등에서 ‘우리가 높네’, ‘어느 대학이 어디를 앞섰네’ 하며 한바탕 ‘학벌 배틀’이 벌어지곤 하는데, ‘입결’의 핵심 지표가 수능 점수다. ‘대학 서열 놀이’를 일삼는 이들을 일컫는 ‘학벌 훌리건’이란 말이 나온 지도 꽤 됐다.
수능이 이처럼 ‘줄 세우기 신공’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상대평가이기 때문이다. 전국 학생들을 1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세울 수 있으니 이만한 잣대가 없다. 상대평가 체제에선 모든 구성원이 똑같이 노력을 하더라도 촘촘하게 등수가 매겨진다. 모두가 끝 모를 경쟁에 내몰리지만, 결국엔 극히 일부를 뺀 대다수를 패자로 만드는 고약한 시스템이다.
올해 수능을 꼭 일주일 앞둔 지난달 10일 “대입 상대평가는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수능과 고교 내신의 상대평가가 “살인적인 경쟁”을 유발해 헌법이 보장한 행복추구권과 건강권, 교육권 등을 침해한다는 취지다. 교육운동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주도한 이 헌법소원에는 변호사 96명이 ‘위헌 선언문’을 통해 지지 의사를 밝혔다. “누군가를 짓밟고 거둔 승리에 대한 강요, 단 1%를 변별하기 위한 평가는 그 목적이 정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파괴적이고 비교육적이며 반인간적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상대평가 체제에서 ‘승자’가 된 변호사들이 100명 가까이 지지 선언을 했다는 것이 놀랍다.
보수 진영에서는 여전히 더 많은 경쟁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한국은 경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나쳐서 숱한 병폐를 낳는 나라다. 김희삼 광주과학기술원 교수가 2017년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등 4개국 대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고등학교가 어떤 이미지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지 조사한 결과를 보면, 한국 대학생의 81%가 ‘사활을 건 전장’이라고 답했다. 중국(42%), 미국(40%), 일본(13.8%)과 견줘 압도적으로 높다. 이런 학교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나 공감, 연대와 같은 공동체적 심성을 기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너선 거슈니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주간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입시 경쟁을 ‘냉전 시대의 끝없는 군비 경쟁’에 빗대기도 했다.
우리는 상대평가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선진국에 속한 나라들 가운데 입시에서 상대평가를 하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대학에 입학할 기회를 주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나라들의 국가 경쟁력이 한국보다 떨어진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상대평가는 오로지 선발 기제로서만 유용할 뿐, ‘배움을 통한 성장’이라는 교육의 본령과는 거리가 멀다. 촘촘한 입시 변별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논리가 강고하지만,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일 뿐이다. 물론 고교 내신을 절대평가로 바꾸려면 반드시 제거해야 할 걸림돌이 있다. ‘학교 다양화’라는 미명 아래 층층이 서열화한 고교 체제다. 특목고와 자사고 등을 유지한 채 절대평가를 도입할 경우, 그 학교들의 ‘입시 특권’만 강화시킬 게 불보듯 뻔하다. 고교 진학 단계에서부터 입시 경쟁이 더 격화하는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경쟁을 숙명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에서, 보수적인 헌재가 상대평가를 위헌이라고 선언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소송 과정에서 ‘너 죽고 나 살자’식 경쟁을 부추기는 상대평가의 폐해를 공론화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너무 익숙해진 탓에 문제점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더 나은 대안을 고민할 필요성도 못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은 <경쟁에 반대한다>에서 경쟁의 본질은 한 사람의 성공을 위해선 다른 이들은 실패해야 하는 ‘상호배타적인’ 목표 달성 방식에 있다고 짚었다. 올해 입시가 끝나면 또 얼마나 많은 ‘실패자’들이 좌절을 겪게 될지 알 수 없다. 입학도 하기 전에 반수를 결심하는 이들도 많으리라. 옆에서 지켜보는 부모에게도 여간 고역이 아닐 것이다. 이렇게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시스템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뭔가.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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