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포커스] 정치가 바뀌어야 나라가 산다
우리는 전략적 사고를 못해
문화·토양 일거에 못 바꾼다면
정치라도 바꿔 급한 불 꺼야
지식인들은 각성·연대를
2020년 여름 미·중 갈등을 주제로 국내 모 학술단체가 주관한 세미나를 온라인으로 참관한 적이 있다. 참석자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국내 외교안보 전문가들이었다. 토론을 마무리하며 사회자가 참석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미·중 갈등 대응책으로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를 꼽으라면 무얼 택하겠냐고. 1) 어느 한편에 확실하게 줄서기, 2) 상황에 맞춰 적절히 헤쳐 나가기(muddle through), 3) 일정한 선을 긋고 사안별로 대처하기. 필자는 당연히 3번에 답이 몰릴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어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든 참석자들이 2번에 손을 들었다.
우리의 생존과 안위를 좌우할 만큼 중차대한 외교전략적 사안에 대해 아무런 원칙이나 기준도 없이 그때그때 상황 논리에 따라 적당히 우리 입장을 정해 나가면 된다는 데 전문가들의 견해가 일치한 것이다. 당혹스러웠다. 미·중 갈등이 지금처럼 본격적인 패권경쟁의 모습을 띠기 이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외교안보 전문가들조차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면 국제질서가 요동을 치는 지정학적 대변환의 시대에 전략적 대응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소회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음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중 전략보고서 하나 나오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일본, 아세안은 물론이고 EU까지 대중 전략을 공표한 상황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리처드 하스 미 외교협회장의 진단처럼 지금은 국제정세가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위험한 상황이다. 세계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글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중국은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흔들기 위해 체제·이념 경쟁을 공언하고 있고, 규범에 기반한 전후 국제질서를 이끌어온 미국은 스스로 만든 규범마저 부정하며 대중 견제에 올인하고 있다. 향후 10년이 미·중 전략경쟁의 결정적 시기가 될 것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미국이 지난 10월 국가안보전략(NSS) 보고서에서 중국을 국제질서를 바꿀 의도와 실행능력을 가진 유일한 경쟁자로 규정하며 공개한 '통합적 억제전략'은 미국의 대중 전략과 동맹에 대한 인식 변화가 가져올 새로운 도전이 얼마나 광범하고 복합적인 양상을 띨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최근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추진 과정에서 불거진 마찰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안보와 기술, 무역이 상호 연동하는 새로운 지정학적 환경의 불확실성 속에서 생존전략 마련이 무엇보다 시급한 때다.
과연 미·중 사이에서 빠져나올 궁리만 해온 지금까지의 소극적 자세로 이 험난한 파고를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촌음을 다퉈야 할 시기에 '산업의 쌀'인 반도체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반도체특별법'마저 2년째 국회 표류를 방치하고 있는 정치적 토양 속에서 국가안보 차원의 생존전략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일찌감치 경제안보상을 임명하고 통합적 '경제안보추진법' 제정 등 발 빠른 행보를 하고 있는 일본을 뻔히 보면서도 반도체특별법 하나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는 정치권에 우리의 미래를 맡겨도 될까? 이 법을 반대하는 사람을 향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땅에 묻는 매국노(埋國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동료 의원을 배신자로 매도하는 정치인들과 미래에 관한 의미 있는 담론이 가능하기나 할까?
전략적 사고를 하지 못하는 사회·문화적 토양을 하루아침에 바꾸긴 어렵다. 정치를 바꿔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진영논리에 찌든 정치생태계를 바꾸지 않는 한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정치를 바꾸기 위한 사회적 동력을 만드는 데 젊은 세대와 깨어 있는 지식인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모든 문제의 원인과 해법은 우리 내부에 있다는 자각에서 진정한 변화는 시작된다.
[조태열 전 외교부 차관·주유엔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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