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조롱 난무하는 이태원 시민분향소···‘2차 가해’ 방관하는 경찰·지자체

박하얀 기자 2022. 12. 20. 16:3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혐오 방조하는 정부 상대 비판도 고조
민변 “가용수단 모두 사용해 법적 대응”
20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광장에 설치된 이태원참사 희생자 시민분향소(왼쪽) 앞에 집회를 신고한 신자유연대의 차량과 텐트 등이 보인다. 박하얀 기자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차린 시민분향소가 극우단체와 유투버들로부터 혐오 발언의 표적이 돼 몸살을 앓고 있다. 유가족들은 ‘2차 가해’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지만 현장을 관리·감독해야 할 경찰과 서울 용산구청은 수수방관하며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지난 19일 오후 4시30분쯤 스스로 ‘지역 주민’이라고 밝힌 한 여성이 서울 용산구 이태원광장에 설치된 시민분향소에 들어왔다. 이 여성은 유가족들을 향해 “시체팔이” “너네 딴 데 가라” 등의 막말을 했다. 몇몇 유튜버들은 이 영상을 찍으며 막말을 온라인으로 중계했다.

분향소 인근에 있던 유가족들은 언어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됐고, 희생자 A씨의 모친은 오열하다 호흡 곤란으로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갔다. 문제를 일으킨 여성은 이윽고 분향소 바로 앞에 설치돼 있는 극우단체 ‘신자유연대’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희생자 A씨의 부친은 텐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만 좀 하시라”고 빌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날 오후 10시쯤에도 앞선 사례와 유사한 모욕적인 언사를 유가족들에게 내뱉는 일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희생자 B씨의 가족이 절규하다 그대로 주저앉아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시민분향소에서 만난 한 유가족은 20일 “우리가 저분들(신자유연대)처럼 피켓을 들고 대통령을 언급한 현수막을 붙여놓느냐”며 “이곳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 잠깐 인사를 하는 곳”이라고 호소했다. 그는 “49재 당일에는 경찰이 (대통령실로의 행진을 막기 위해) 몇 겹씩 바리케이드를 쳤는데, 이곳은 그때처럼 왜 못 막느냐”고 되물었다.

신자유연대 회원들은 이따금씩 현장에서 마이크를 들고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관계자들을 비난하는 발언도 하고 있다. 현장에 세워놓은 차량과 거리에 ‘이태원 참사 정치 선동꾼들 물러나라’고 적힌 현수막도 걸어뒀다. 이미현 시민대책회의 상황실장은 “경찰에게 ‘혐오 발언을 방관하지 말고 장소를 이동시켜서 발언이 안 들리도록 하면 유가족들이 흥분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했지만, 경찰은 물리적 충돌만 없게 한다는 식으로 중간에 설 뿐 발언들이 계속되도록 놔두고 있다”고 했다.

이태원 참사 49재인 지난 16일 이태원참사 희생자 시민분향소 앞에 주차된 신자유연대의 차량에 ‘이태원 참사 추모제 정치 선동꾼들 물러나라’고 적힌 펼침막이 게시돼 있다. 조문객들을 맞는 유가족들은 매일 이 문구를 마주해야 했다. 박하얀 기자

경찰은 신자유연대가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집회·시위 등을 하고 있다며 제지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경찰 관계자는 “표현이 잘못됐으니 표현하지 말라는 건 집회·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며 “분향소의 특수성이 있으니 현장에서 설득하고 기동대를 배치해 상호 충돌을 방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분향소는 구청에 신고하고 승인받아야 해 구청 소관”이라고 했다.

그러나 행정 조치에 나서지 않는 것은 용산구청도 매한가지다. 구청 관계자는 “(구청 차원의 조치는) 현재 검토된 바가 없다”며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는 분향소와 관련해서는 조치를 못한다”고 했다. 분향소 설치 전날 시민대책회의가 보낸 협조 요청 공문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가 말을 바꾼 것이다. 되레 신자유연대는 이 같은 구청 주장에 편승해 시민분향소 설치 자체가 위법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상임활동가는 “집회·시위 장소의 경합이 아니라 피해자, 생존자에 대한 혐오 행위의 문제”라며 “(경찰과 구청의 조치는) 혐오를 등에 업고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박한희 시민대책회의 피해자권리위원회 변호사는 “지자체가 권한이 없다고 할 게 아니라 현장에 나와 행정지도를 하거나 대화 테이블을 만드는 등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며 “애매한 메시지를 주면 사람들은 자신의 언행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초반에 잘 대처하지 않으면 혐오 표현은 점점 심해질 것”이라고 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은 이날 성명을 내고 “분향소에서 자행되는 2차 가해 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을 엄중히 경고한다”며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피해자들에 대한 조롱과 혐오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려는 이들은 보다 자극적이고 모욕적인 표현을 일삼으며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조차 저버렸다”며 “정부는 침묵으로 2차 가해 행위자들을 돕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입장을 표명하고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박하얀 기자 whit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타임톡beta

해당 기사의 타임톡 서비스는
언론사 정책에 따라 제공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