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공산당 창건자 시손 망명지에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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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공산당 창건자인 호세 마리아 시손이 망명지 네덜란드에서 지난 16일(현지시간) 향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일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필리핀 공산당(CPP)은 시손이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의 병원에 2주 간 입원해있다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좌파 조직원이자 시인이었던 시손은 1968년 12월26일 13명의 젊은 동지들과 비밀리에 필리핀 공산당을 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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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내용 요약
공산당, "필리핀 프롤레타리아 등불의 죽음 애도"
국방부, "시손 없는 새 시대 도래…더욱 나아질 것"
[서울=뉴시스]조성하 기자 = 필리핀 공산당 창건자인 호세 마리아 시손이 망명지 네덜란드에서 지난 16일(현지시간) 향년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일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필리핀 공산당(CPP)은 시손이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의 병원에 2주 간 입원해있다가 사망했다고 전했다. 다만 구체적인 사망 원인은 밝히지 않았다.
공산당은 "필리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등불이자 스승의 죽음을 애도한다"며 "그는 지난 세기 가장 위대한 필리핀인"이라고 경의를 표했다. 정부군도 "공산당이 시손을 대체하기 어려울 것이며 그의 죽음이 운동을 더 약화시킬 수 있다"고 전했다.
좌파 조직원이자 시인이었던 시손은 1968년 12월26일 13명의 젊은 동지들과 비밀리에 필리핀 공산당을 창당했다.
이듬해 그는 반군 지도자에 합류해 구식 무기로 무장한 소규모 부대와 함께 신인민군을 조직해 반정부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신인민군은 필리핀 전역에 흩어져 2만5000명의 무장 게릴라로 성장했다. 또 토지 소유자를 대상으로 암살 및 강탈 계획을 수립해 정부를 불안정하게 했다.
이런 반란의 위협은 1986년 페르난데스 마르코스 대통령 축출로 이어지기도 했다. 미국 정부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인기 하락이 공산주의 야당 성장에 기름을 붓고 있다는 판단 아래 시손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마르코스 독재 정부에 저항하던 공산당은 신인민군을 통해 필리핀 정부군과 지금까지 싸우고 있다.
시손은 1977년에 체포돼 1986년까지 구금되어 있었다. 1984년 감옥에서 시손은 시집인 '감옥과 그 너머'(Prison and Beyond)를 출간해 그의 다른 저작과 함께 동남아시아 작가상을 수상했다.
마르코스 독재 종식 후 첫 민선대통령이었던 코라손 아키노는 마르코스를 몰아낸 뒤 정치범들을 석방했다. 석방 이후 시손은 필리핀 대학의 교수진에 다시 합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혁명 촉진을 위한 순회 강연을 위해 필리핀을 떠났다.
1987년 코라손 아키노 정부와의 평화 회담이 결렬된 후 시손은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유럽 망명 중에도 무장 투쟁을 지원했으며, "외국에서 혁명을 이끈다"며 공산당 지도자 역할을 지속했다.
네덜란드는 1995년 그에게 공식 망명을 허가했다. 2002년 미국은 그를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렸다.
한편 필리핀 국방부는 성명을 내 "필리핀에 시손 없는 새 시대가 도래하면 우리 모두 더 나아질 것"이라며 또 다른 시각을 내비쳤다.
☞공감언론 뉴시스 create@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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