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면 12시, 지면 1시 취침” 떡잎부터 달랐던 세계 1위 신진서
4~5살 때 어린이집 가기 싫어 부모님 하는 바둑학원서 지내
중학생 땐 ‘광기’라 할 정도로 승패 집착, 이젠 전체과정 중시
AI 수천년 내려온 바둑 바꿔, 독창성·기풍 약해지는 건 아쉬움
신진서 9단과 인터뷰를 하면서 좀 놀랐다. 약관의 나이(신 9단은 2000년생이다)에 이세돌 9단을 능가할 정도로 전투적이고 호승심이 강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차분한 은둔 고수를 대하는 듯했다. 목소리는 조용조용했고 눌변이 아닌데도 말을 가려서 하려 애쓴다는 인상을 짙게 받았다. 그 나이와 성적에 어울리지 않는 고요함과 겸손함이 어색했던 건, ’호전적 기풍’이라는 선입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 9단이 쌓은 기록은 전무후무하다. 2022년 11월까지 통산 836전 644승 2무 190패, 승률 77.22%로 역대 한국 기사 중 가장 높다. 올 한해 전적은 78승 13패(승률 85.17%)에 이른다. 엘지(LG)배와 농심신라면배에 이어 지난달 삼성화재배 월드바둑 마스터스까지 우승해 국제 기전을 세번 연속 제패했다. 올해 누적 상금은 14억1700여만원으로, 역시 역대 최고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터넷으로 바둑을 공부한 신진서 9단에게 바둑은 어떤 의미이며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지 물었다. 인터뷰는 6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회의실에서 이뤄졌다. 회의실 벽엔 조남철-김인-조훈현-이창호-유창혁-이세돌-박정환으로 이어지는 역대 한국 바둑 일인자들의 대국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 언제 어떻게 바둑에 입문하게 됐습니까? 너댓살 때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는데, 스스로 바둑에 재능이 있다는 건 본인도 느꼈습니까?
“4살인가 5살 무렵에 제가 어린이집에 가는 걸 안 좋아했어요. 부모님(아버지는 아마 5단, 어머니는 3급 실력이다)이 부산에서 바둑학원을 하셨는데, 어린이집을 안 가니까 바둑학원에서 온종일 있었고, 거기서 할 게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바둑을 두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주변에서 재능 있다는 얘기를 듣긴 했는데 저는 뭐 그런 걸 잘 몰랐죠. 7살 때 기력이 아마 7단 정도였는데, 그 무렵부터 아, 내가 바둑에 재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거 같긴 해요.”
― 과거에 바둑 영재들은 유명 기사의 문하생으로 들어가서 숙식을 같이하면서 바둑을 배우곤 했습니다. 신 9단은 인터넷으로 바둑을 두면서 실력을 키운 ‘인터넷 세대’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제가 아마 마지막 인터넷 세대인 거 같아요. 지금은 기사들이 인터넷에서 실명을 쓰기도 하고, 거의 100% 상대방 아이디를 알고 있으니까 아는 사람들끼리만, 프로 기사들끼리만 대국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어릴 적에는 인터넷에서 누가 아마추어고 누가 프로 기사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어요. 그냥 두는 거죠. 그러다 보니 아마추어들도 프로 기사와 대국을 하면서 실력을 키울 기회를 얻은 거 같아요. 저도 어릴 적엔 두점 가까이 센 강자와 대국을 많이 했거든요. 프로 기사와 두면 당연히 기량 발전에 큰 도움이 되는데, 그런 점에서 당시의 인터넷 바둑 혜택을 좀 많이 받은 거 같아요.”
― 선배 바둑기사들 중에 누구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
“조훈현 사범님과 이창호 사범님은 제가 직접 배운 건 아니고 기보를 보면서 많이 배웠어요. 이창호 사범님이 응씨배 우승할 때(2001년)가 바둑 붐이 일어나는 시기여서 모두들 이 사범님을 배우려 했지요. 제 바둑의 기풍으로 따지면, 이세돌 사범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지 않았나 생각해요. 어린 마음에 이세돌 사범님 바둑이 멋있다고 생각해서 닮으려고 많이 노력을 했어요. 그걸 좀 잘 닮았어야 하는데 제가 부족해서 안 좋은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제 바둑이 너무 전투적으로 가서 문제가 있었던 거 같긴 해요.
프로 입단하고 나서는 1인자였던 박정환 9단의 영향이 가장 컸습니다. 박 9단과 대국한 것만 60판에 육박하기 때문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큰 도움을 받은 거 같아요. 왜냐하면 제 바둑이 전투적 성향이 강하다 보니까 물 흐르듯이 두는 바둑에 약하고 끝내기 실수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박 9단과 대국을 많이 하면서 그런 부분들이 확실히 나아진 걸 느낍니다. 정말 큰 도움을 받은 거죠.
그리고 박정환 9단은 평정심이 대단합니다. (2018년 중국 하세배 결승에서) 중국의 커제 9단이 박정환 9단과 대국하면서, 실수를 하니까 자기 뺨을 때리고 바둑돌을 던지기까지 해요. 그런데도 박 9단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더라고요. 그 장면을 보면서 나도 저런 건 배워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침착하니까, 박정환 9단과 대국을 하면서 저도 조금씩 배운 거 같아요.”
― 신 9단 본인도 자신의 기풍이 전투적이라고 했는데, 신 9단에 관한 기사를 찾아보면 거의 빠지지 않고 나오는 표현이 ‘매우 전투적이다’라는 겁니다. ‘유리해도 물러서지 않고 잡을 수 있는 돌은 잡는다’는 말을 했다던데, 사실입니까?
“예전에는 확실히 그랬습니다.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5년 전 인터넷 대국을 하는데, 마지막에 한집짜리 패가 남았어요. 끝내기도 다 끝나고 공배만 남은 상태에서 이 패를 져도 반집 승이 확실했습니다. 상대가 어떤 팻감을 쓰든 받아주면 무조건 반집 이기는 건데, 그 팻감이 성립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냥 안 받아 버렸죠. 그래서 바둑이 엄청 복잡해졌습니다. 지금은 그런 모험을 안 합니다. 당연히 100% 이기는 길로 가죠.(웃음) 그런데 전투적인 기풍이 제 장점 중 하나니까, 전체적인 성향은 그대로 가고 있는 것 같긴 합니다.”
― 요즘은 코로나로 국제기전은 모두 인터넷 대국을 하는데, 대면 대국하고 인터넷 대국은 어떻게 다릅니까? 신 9단은 어느 쪽이 좀 더 편하신가요?
“대면 대국에선 기사들의 기가 좀 작용을 합니다. 이세돌 사부님의 기가 센 편인데, 저도 대국을 해보면 그런 걸 느끼겠더라고요. 예전에 저는 기가 좀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그래도 많이 나아졌습니다.
또 상대방이 바둑돌을 시끄럽게 손에 쥐고 흔든다거나, 형세 판단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 등이 모두 대면 대국에선 영향을 주죠. 국제기전에서 인터넷 바둑이 편한 건, 이동시간에 따른 피로를 줄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전엔 중국에서 대국할 때 10시간씩 이동한 적이 있거든요. 그러면 아무래도 컨디션에 영향이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인터넷 바둑이 좀 편한 측면이 있어요.”
― 지난달 삼성화재배 월드바둑 마스터스 우승은 신 9단에겐 각별한 의미가 있을 거 같습니다. 2020년과 2021년에 연속 준우승을 했지 않습니까? 올해는 꼭 우승해야겠다는 각오나 자신감 같은 게 남달랐습니까?
“그런 동기 부여는 3년 연속 똑같았던 거 같아요. 2020년엔 제가 우승 타이틀이 많은 상황이 아니어서 꼭 우승하고 싶었고요, 지난해도 당연히 우승하고 싶었죠. 그래서 이번이 가장 간절했다고 말하긴 어려울 거 같아요. 다만, 이번엔 시합 전에 연습 대국을 날마다 두면서 엄청 열심히 준비했고, 8강-4강-결승에 올라가면서 점점 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우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 이번 삼성화재배 결승은 세계대회에선 최초로 최정 9단과의 남녀 성대결이란 점에서 특히 언론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이런 식의 언론의 관심이 부담이 되진 않았습니까?
“그런 부담은 전혀 없었습니다. 최정 9단이 운으로 결승에 올라온 게 아니라 강자들을 연달아 이기고 실력으로 올라온 거니까, 오직 강자와 맞붙는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아무런 부담이 없었어요. 최정 9단은 대단한 게, 여류기전에선 적수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시거든요. 그러면 마음이 느슨해질 수 있을텐데 그런 건 전혀 없이 커리어를 계속 경신해 나가시니까, 그런 건 저도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 신 9단 같은 고수도 대회 결승전 같은 경우엔 바둑돌을 놓을 때 손이 떨립니까?
“제가 2018년 지에스칼텍스배에서 첫 우승을 할 때는 손이 막 떨렸던 기억이 납니다. 이 돌만 놓으면 우승이라는 생각을 하니까 손을 떨었던 거 같아요. 이제는 뭐 별로 떨지는 않습니다.”
― 2016년에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 보셨죠? 그때 알파고가 이길 수 있으리란 예상을 했습니까?
“전혀 못 했죠. 당연히 이 사범님이 이길 거로 생각했죠. 사실 1국 때는 알파고 실력이 긴가민가했어요. 처음 보는 수가 많았고, 누가 유리한지 모르겠는데 나중에 끝나 보니까 이세돌 사범님이 져 있더라고요. 이게 뭐지 싶었지만 그래도 전투는 알파고가 약할 거다 라고 생각했어요.
2국을 보고 나서 알파고 실력에 대한 의심은 싹 사라졌죠.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알파고를 흔들어 4국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이세돌 사범님 말고는 없겠다, 나중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 인공지능(AI)이 수천년 내려온 인간의 바둑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생각합니까?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죠. 우선 첫 번째로 당연히 수법에 관한 변화죠. 과거엔 이런 수는 안돼, 저런 수도 안 돼 이런 게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없어졌어요. 일단 어떤 수든 이기기 위한 수면 둘 수 있다, 자신 생각에 이게 좋으면 둘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당연히 정석과 이론도 많이 깨졌고요.
아쉬운 부분도 많죠. 프로 기사면 바둑판 위에서 뭔가 자기만의 예술을 만들어간다는 그런 생각이 있었는데 이런 게 좀 깨진 측면이 있어요. 기풍의 차이가 많이 깨진 것, 그런 것도 아주 아쉽죠.
장점도 많아요. 과거엔 정상에 있거나 바로 그 밑에 있는 기사들은 뭔가 뚜렷하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없었어요. 아무리 공부를 해도 이게 기량 발전에 큰 도움이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죠. 지금은 인공지능이 있으니까, 인공지능의 수를 연구하면서 끝없이 발전할 수 있다, 그런 부분에서 특히 정상에 있는 기사들이 더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 거 같아요.”
― 좀 전에도 얘기가 나왔지만, 과거엔 바둑 기사들의 기풍의 차이를 보는 재미가 있었는데 인공지능이 나오면서 이런 기대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종종 바둑 애호가들은 말합니다. 이런 우려에 대해 신 9단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런 우려가 있긴 하죠. 제가 아는 후배가 굉장히 전투적인 바둑을 뒀는데, 인공지능으로 공부를 하니까 그런 기풍이 줄어드는 것 같긴 해요. 인공지능은 승률 높은 수를 중시하니까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바둑은 20세기까지 공동연구도 안 되고 진짜 철저히 순수한 개인의 실력에 의해서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21세기 들어서 중국에서부터 공동연구가 활발해졌고 특히 포석이 좀 단순해졌어요. 인공지능이 나온 뒤에는 이걸 비틀어서 연구를 하면 되니까 오히려 포석 부분은 좀 더 다양해졌다고 할까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가장 아쉬운 건, 아무래도 기사들이 인공지능으로 공부하다 보니까 과거와 같은 독창성이 약해지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 예전엔 초반에 안 좋은 수일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수를 둬서 바둑을 이끌어나가 역전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지금은 인공지능을 따라 하려는 마음들이 아무래도 있죠.”
― 올해 엘지배와 농심신라면배에 이어 삼성화재배까지 세 번 연속 국제 메이저대회 우승을 했습니다. 이제 바둑올림픽이라는 응씨배 우승만 남았는데, 신 9단은 결승에 이미 올라 있습니다. 결승전은 언제 열립니까?
“내년에 한다고는 하는데 언제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사실 올해 결승전이 열릴 줄 알았는데..., 내년에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1년에 공식 대국을 몇 번이나 합니까?
“1년에 공식적으로 약 100판 정도 둡니다. 평균적으론 3일에 한판 꼴인데, 시합에 따라서 하루에 두판 두거나 며칠 동안 계속 하루 한판씩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 그렇게 두려면 정신력뿐 아니라 체력도 중요할 거 같은데,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과거에 이창호 사범님이나 이세돌 사범님을 보면, 체력 관리를 하기보다는 그냥 ‘깡’으로 바둑을 두셨던 거 같아요. 깡이 워낙 세셔서, 과연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박정환 9단은 자기 관리를 굉장히 잘하시더라고요. 그걸 보고서 저도 생활태도를 좀 바꿨습니다. 운동을 안 좋아했는데 지금은 조금씩 운동으로 체력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중학생 때 만들었다는 생활계획표를 봤습니다. 하루종일 바둑만 두는 일정이던데, 그렇게 바둑이 재밌었습니까? 그때의 신진서와 세계 정상에 선 지금의 신진서를 비교하면 뭐가 가장 달라진 거 같습니까?
“중학생 때는 바둑이 재밌기도 했고, 정말 광기라고 할 정도로 승패에 집착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한번은 밤에 인터넷 바둑을 뒀는데, 한판만 이기고 자려고 했는데 지는 바람에 계속 두다가 결국 6연패를 했어요. 잠이 안 오죠. 상대가 중국 프로기사 탕웨이싱이었는데, 중학생이 아무리 잘 둔다 해도 탕웨이싱 9단을 이길 수 있겠어요? 그래도 조금 밀리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계속 두자고 했던 거죠. 이게 좋지 못한 습관인데, 한편으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됐던 거 같아요.
지금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축구팬들 가운데 승패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분도 있지만 선수들의 아름다운 플레이나 모습을 즐기시는 분들도 많잖아요? 저도 중학생 때는 승패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전체적인 과정을 많이 봅니다.
제가 옛날 바둑기사들의 책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 대신에 부모님이 기원을 하셨으니까 이리저리 주워들은 얘기들은 제 또래 다른 기사들보다는 많을 거예요. 조훈현, 서봉수 9단이나 이창호 사범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또 일본 바둑 전성기 시절의 사카다 9단이나 오청원(우칭위안) 9단의 이야기를 알지는 못하지만, 그때의 풍경이라든지 분위기, 바둑에 대한 마음가짐은 조금씩은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때의 바둑은 지금과는 다른 장점이 컸던 거 같고, 그런 점이 사라진 건 좀 아쉽죠.
제가 어릴 때 인터뷰를 하면서 ‘바둑은 인생과 비슷하다’는 대답을 한 적이 있어요. 열 살 조금 넘은 나이에 인생을 알면 뭘 알겠어요, 그냥 주워들은 얘기를 대답했던 건데, 이제는 그런 바둑 격언들을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거 같긴 해요. 바둑에 승패만 중요한 게 아니라 태도가 아주 중요하다는 걸 느낍니다. 바둑은 스포츠이면서도 기도(棋道)라는 말이 있듯이 도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고 봅니다. 많이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특히 합니다.”
대기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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