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말로 설명할 수 있었다면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화업 70년 대표 회화 120점 출품
93세 ‘살아있는 전설’이 전하는 삶과 자연의 아름다움
프랑스 현대미술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앙드레 브라질리에(93)의 대규모 회고전이 서울에 마련됐다. 국제적으로 주요 전시를 통해 ‘20세기 정통 회화의 마지막 계승자’라는 평을 듣는 세계적 원로 작가의 깊고 넓은 예술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다.
브라질리에의 국내 최대 작품전 ‘앙드레 브라질리에 특별전-멈추어라, 순간이여!’가 20일 서울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막을 올렸다. 대규모 회고전답게 전시장에는 초기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과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회화 120여점이 선보인다. 1950년대부터 시대별로 작가가 엄선한 대표작들이 망라됐다.
브라질리에는 감정 등 작가의 내면세계를 예술적으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표현주의적 토대 위에 회화의 진정한 맛을 전하는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균형미가 두드러지는 구성, 간결한 붓질 속에 군더더기 없이 단순화시킨 대상, 평안하며 포근한 색채들의 대비와 조화, 오케스트라의 빼어난 연주처럼 여러 요소들의 섬세한 어우러짐 등이 돋보인다. 일상 속에서 예술가로서 포착한 아름다움을 담아낸 작품들은 시적·명상적이며 때로는 몽환적 분위기로 다가온다.
자연과 인간 삶의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그 속에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선사함으로써 긴 여운, 깊은 울림을 전한다. “삶과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예술”이라는 그는 “말로 설명할 수 있었다면 그림으로 그려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브라질리에는 70여년 동안 일관되게 세 가지 소재에 심취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자연 속에 자유롭게 거닐며 특유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말, 작가의 영원한 뮤즈라는 부인 샹탈(Chantal), 그리고 또 다른 예술세계인 음악이다. 그는 이 세 가지 소재를 중심으로 예술세계를 구축한다.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고 즐기는 핵심 요소들이기도 하다.
그에게 말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다. 아름다움, 자연, 신성, 힘과 역동성을 상징하는 존재다. 어린 시절부터 말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다는 그는 “말이 지닌 특별한 예술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그들이 풍기는 자연스러운 기품, 품위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말과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져 공존·공생하는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해 작품에 담아냈다. 특히 말과 자연 풍경을 파랑색·주황색·검은색 등의 독특한 색채로 표현해 초현실적 분위기, 환상적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이번 특별전에는 ‘푸른 겨울’ ‘하늘의 말들’ ‘롱페뉴의 석양’ 등이 출품됐다.
브라질리에의 작품 속 여인은 그의 부인 샹탈이다. 그는 평생을 사랑해온 아내에 대한 끝없는 애정을 강조하며, 자신의 “영원한 뮤즈”라고 밝혔다. 예술가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준 그리스 신화 속 예술의 여신 뮤즈처럼 부인이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라는 의미다. “샹탈은 언제나 저와 함께한다”는 그는 샹탈을 모델로 한 많은 회화작품을 빚어냈다. 이번 특별전에선 ‘흰색 벤치에 앉아 있는 여인’(하얀 벤치) ‘장미원’ ‘검은 옷을 입은 샹탈’ 등을 만날 수 있다. 아름다운 사랑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의 가장 소중한 요소임을 새삼 되새기게 한다.
음악도 브라질리에 작품세계의 핵심 축이다. “예술의 힘은 정말 신비롭다. 그림과 음악은 하나이고 똑같다”는 그는 “베토벤, 모차르트 등의 화음이 저의 조형성을 일깨운다”고까지 표현했다. 그가 강조하는 단순함과 조화로움의 회화적·시각적 표현이 음악을 통해 구체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5중주’ ‘뉴올리언즈’ 등 음악을 소재로 한 작품들은 보이지 않는 음악을 시각화함으로써 또 다른 예술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브라질리에는 한 세대 전의 선배 작가들인 샤갈, 피카소 등 프랑스 미술의 황금기 거장들과 예술적 교류를 한 프랑스 현대미술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그는 1929년 프랑스 서부 소뮈르의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화가인 아버지 자크 브라질리에의 영향으로 10대부터 그림에 관심을 가졌고, 저명한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의 로마 유학 장학생으로 선발돼 로마의 ‘아카데미 드 프랑스’에서 견문을 넓혔고, 이후 여러 미술상을 수상하며 프랑스는 물론 유럽 화단에 두각을 드러냈다.
1959년 첫 개인전 이후 전 세계 주요 전시에 참여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뮤지엄·독일의 루드비히 샤를루이스 뮤지엄·미국의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등에서의 대규모 회고전 등으로 큰 주목을 끌었다.
브라질리에는 “푸생, 들라크루아, 고갱, 마티스, 루오 등을 연구하며 그림 공부를 했기에 (그들이) 저의 뿌리”라며 “작업을 지속할 수 있게 자극을 주는 거장들에게 늘 감사하다”고 강조한다. 또 “다른 예술가와 작품들이 제게 배움을 주고 예술과 삶을 성장시켰지만, 제 작업을 변형시킨 것은 아니다”라며 자부심도 드러낸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특권을 받아 늘 신께 감사하다”는 이 원로 화가는 고령에도 여전히 말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 선다. 삶과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예술이야 말로 “즐거운 생활”이기 때문이다. 전시는 내년 4월9일까지.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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