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도라지 위스키’가 있었다

정혁준 2022. 12. 2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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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에 대하여’ 최백호 인터뷰]
생후 5개월 무렵 부친 작고
20살 때 모친 췌장암으로 별세
아픔 극복하고 성찰 녹인 노래 인생
수많은 히트곡에 사연 가득한 이유
7일 가수 최백호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아파트 작업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에서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은 어떻게 쓰게 된 건가요?”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아파트 작업실에서 만난 최백호에게 기자가 물었다.

이 노래를 작사·작곡한 최백호는 이렇게 답했다. “그때 다방의 마담들은 외모나 차림새에서 그렇게 세련돼 보이진 않았어요. B급이었죠. 하지만 마담들은 나름대로 세련되게 보이려 애를 썼어요. 그런 느낌을 가사에 실었죠.”

‘실없이 던지는 농담’이라는 가사는 어떻게 나왔을까?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던지는 시시껄렁한 얘기들이었죠. B급 마담에게 관심받아보려는 B급 사람들의 농담이었죠.”

최백호는 말을 이었다. “그런 시시껄렁한 농담을 잘 받아주는 마담이 매출을 잘 올렸어요. 홍차나 커피는 팔아도 매상이 크지 않았지만 위스키는 매상이 높았죠. 실없이 던지는 농담을 잘 받아주는 마담들이 위스키를 잘 팔았죠.”

‘도라지 위스키’였다. “그때만 해도 위스키는 비싸서 못 사 먹는 술이었죠. 돈 좀 번 선배가 술 사줄 때 얻어먹는 그런 술이었죠. 허허~”

도라지 위스키 광고 사진. 인터넷 커뮤니티 갈무리

‘도라지 위스키’는 일본 주류회사 산토리가 만든 ‘도리스 위스키’ 이름을 살짝 도용한 술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도리스 위스키’가 우리나라에서 판매 금지된 뒤 국내 한 양조사가 비슷한 이름으로 만든 술이었다. 1956년부터 생산됐지만, 위스키 원액을 첨가하지 않은 ‘도라지 위스키’는 1970년대 국내 위스키가 잇따라 나오면서 1976년 단종됐다.

최백호가 기억하는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은 부산 동래시장 근처의 어느 허름한 다방이었다. 1970년대 초 힘들었던 시절 길을 걷다가 갑자기 비가 쏟아져 들어간 곳이었다. 최백호는 그 다방에서 색소폰 음악을 하나 들었다. 색소폰 연주자 에이스 캐논의 연주곡 ‘로라’였다. ‘낭만에 대하여’는 그 당시 추억이 모티브가 됐다.

최백호 16번째 앨범 <열여섯번째 이야기>(1994). 이 앨범에 ‘낭만에 대하여’가 실렸다. 대영에이브이 제공

그런 낭만의 추억은 20여년 동안 최백호 가슴에 묻혀 있었다. ‘낭만에 대하여’는 최백호의 정규 16집(1994)에 실리면서 세상에 나왔다.

최백호는 45살 나이에 지나간 청춘의 낭만을 애절한 허스키 목소리로 노래한 이 곡을 이렇게 얘기했다. “나이가 들어 40대 중반에 쓴 노래였죠. 40대 중반은 늙기 시작할 때니까요. 삶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 지나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 남을 때였죠. 30대엔 못 만드는 그런 노래였죠.”

‘낭만에 대하여’를 탱고 풍으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탱고 리듬이 옛 정취를 떠올리게 하는 올드한 느낌을 주니까요. 낭만적인 리듬이기도 해서 가사와도 잘 어울렸죠.”

하지만 이 노래는 하루에 앨범 한장 팔릴까 말까 했던 탓에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송작가 김수현이 자신의 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우연히 듣고 반했다고 한다.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란 대목에서다.

김수현은 노래 이름과 가수를 찾아본 뒤 자신이 쓰고 있는 인기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KBS)에 이 노래를 넣었다. 드라마에서 배우 장용이 ‘낭만에 대하여’를 부르는 장면이 나간 뒤 역주행이 시작됐다. 앨범은 나온 지 2년이 지난 때에 35만장 넘게 팔렸다.

7일 가수 최백호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아파트 작업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혁준 기자
“바닷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어릴 적 내 친구/ 푸른 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는다/ 누가 뭐래도 나의 친구는/ 바다가 고향이란다”(최백호 ‘영일만 친구’)

‘영일만 친구’(1978)는 실제 친구를 모델로 만든 노래다. “포항의 한 여관방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 만든 노래입니다. 홍수진이라고 포항에서 음악다방 디제이(DJ)로 일했던 친구였는데, 나중에 울산 문화방송 라디오 피디가 되고 시인으로도 활약했죠.”

그때 두 사람은 영일만의 한 술집에서 만나 유신 독재 말기의 암울한 시대를 얘기하다 여관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최백호 골든디럭스 1집(1979). 최백호의 3집에 해당하는 음반으로, 그의 히트곡 중 하나인 ‘영일만 친구’를 처음 수록했다. 지구레코드 제공

‘영일만 친구’는 <최백호 골든디럭스 1집>(1979)에 실렸다. 이듬해 최백호는 이 곡으로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동양방송>(TBC)의 1980년 마지막 방송가요대상에서 남자가수상을 받았다.

이 노래는 부산의 ‘부산갈매기’, 인천의 ‘연안부두’, 목포의 ‘목포의 눈물’처럼 포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됐다. 축구 케이(K)리그 포항 스틸러스 응원가이기도 하다.

최백호는 이 노래와 관련해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얘기했다. “2010년 포스텍(포항공대)에서 지역 쌀로 만든 새 막걸리를 개발했는데, 이름을 ‘영일만 친구’로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왔어요. 그래서 ‘오케이’ 했어요. 그 뒤 판매가 잘 된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근데 막걸리 한병도 보내주지 않았어요. 지금도 판매하고 있다면 한병 부탁드립니다. 허허~”

가수 최백호. 씨제이이엔엠 제공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해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걸으며/ 옛일을 잊으리다/ 거리엔 어둠이 내리고/ 안갯속에 가로등 하나/ 비라도 우울히 내려버리면/ 내 마음 갈 곳을 잃어”(최백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최백호의 데뷔곡은 ‘내 마음 갈 곳을 잃어’(1976)다.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라는 가사가 인상적인 노래다. 스무살 때 아픈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쓴 가사였다. 어머니의 삶이 단풍이 지고 눈이 오는 겨울까지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 가사를 쓸 당시 심정이 어떠했는지 궁금했다.

“스무살 되던 해 어머니가 갑자기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죠.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세상 물정도 모르는 외동아들이었죠. 어머니가 아프실 때 밤에 혼자 메모했던 글을 노래로 만든 거예요.”

1950년 부산에서 태어난 최백호는 생후 5개월 무렵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 최원봉씨는 29살 나이에 부산 영도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70년 스무살 가을에 어머니마저 암으로 돌아가셨다. 작곡가였던 최종혁이 최백호의 메모를 보고 곡을 붙여 노래를 만들었다.

최백호가 윤정하와 함께 낸 데뷔 앨범(1976).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히트하자 이듬해 최백호 독집으로 재발매했다. 서라벌레코드 제공

최백호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유명한 선배 가수 하수영이 주선해 당시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윤정하와 함께 1976년 앨범을 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이 앨범에 실렸다. 데뷔곡이자 히트곡이 된 이 노래로 최백호는 가요계의 샛별로 떠올랐다. 노래가 히트하자 이듬해 앨범은 독집으로 재발매되기도 했다. 어머니를 그린 사모곡이지만 대중에겐 애절한 이별 노래로 다가왔다.

가수 최백호. 씨제이이엔엠 제공

‘낭만에 대하여’ ‘영일만 친구’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최백호의 긴 노래 인생에서 ‘찰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 ‘찰나’가 모여 최백호라는 거장을 만들었다.

최백호는 지난달 10일 후배들과 함께 앨범 <찰나>를 선보였다. 그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찰나’를 이렇게 얘기했다. “삶이란 순간순간인 찰나와 찰나가 연결된 거죠. 그러니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잘 보내야 하는지가 중요해요.”

<찰나> 앨범 맨 처음엔 래퍼 지코의 ‘찰나의 순간’이라는 내레이션이 실려있다. 여기서 지코는 이렇게 얘기한다. “찰나의 순간, 여러분의 낭만은 오늘도 안녕하신지 조심스럽게 물어봅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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