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광장] 두 번째를 소환하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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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12월,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이 이뤄지던 날 경성의 사람들은 안창남과 비행기에 열광하고 있었다.
이날 그의 비행은 '두 번째로 조국의 하늘을 비행한 한국인'이라는 역사와 명예를 안겨줬지만 그와 장백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고, 역사는 그를 소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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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12월,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이 이뤄지던 날 경성의 사람들은 안창남과 비행기에 열광하고 있었다. 여의도 비행장 언저리에는 높은 꿈을 가진 또 다른 청년이 있었다. 그의 꿈도 높이 나는 것이었다. 이날의 광경을 지켜본 그는 결심을 굳힌다. 그날로부터 1년여가 지난 1923년 12월 19일, 다시 여의도 비행장. 한 대의 단발 복엽기가 경성의 하늘을 날아올랐다. 비행기는 ‘장백호(長白號)’이고 비행사는 이기연(李基演·1897~1927)이라는 인물이었다. 이날 그의 비행은 ‘두 번째로 조국의 하늘을 비행한 한국인’이라는 역사와 명예를 안겨줬지만 그와 장백호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고, 역사는 그를 소환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 중에 두 번째나 2등은 첫 번째나 1등의 빛에 가려져 기억의 이면으로 물러나 있을 때가 많다.
1923년 1월, 이기연은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그해 9월 비행사 면허를 취득한다. 기계와 운전에 관심이 많던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미 일본에서 자동차와 관련된 일을 배우고 경성으로 돌아와 자동차사업을 펼치고 있는 터였다. 유학파에다 인물 준수하고 사업수완도 좋은 그에게는 당대 최고의 예기(藝妓) 이진봉(李眞鳳)이 연인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녀는 ‘조선미인보감’에 이름이 올랐을 정도로 빼어난 예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시조와 속요를 잘 부르고 춤 솜씨가 남달랐다. 이기연에게 유학을 권유하고 자금을 대어준 이도 그녀였고, 1927년 서른 살에 문경 땅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주검을 경성으로 운구한 이도 그녀였다. 두 사람의 스토리는 마치 시인 백석과 자야 여사와의 관계를 연상케 한다.
얼마 전 이기연 비행사의 손자가 박물관을 방문했다. 박물관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이기연에 관한 자료실장의 글을 읽고 자료를 기증하기 위해 방문한 길이었다. 함께 온 증손자의 손에는 보자기가 들려 있었는데 그 안에는 세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한 장은 장백호를 배경으로 열댓 명이 늘어서 있는 기념사진이었고, 또 다른 한 장은 와인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수십명이 행사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장면이며, 나머지 한 장은 인물 좋은 이기연의 독사진이었다. 그동안 신문 속에 흐릿하게 인쇄돼 전하는 이기연과 장백호가 선명한 모습으로 다가온 순간이었다.
사진은 참 많은 것을 얘기해줬다. 장백호의 ‘장백’이라는 글자와 프로펠러 터빈 덮개에 쓰인 ‘경성비행기연구소’라는 글자는 선명했고, 사진의 한쪽에는 ‘1924년 5월 31일 이기연 씨 강경에서 비행’ ‘강경 구라모토 스튜디오’ ‘공주 이원태 사진관’ 등의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장백호는 영국에서 설계한 ‘AVRO 504K’를 일본 나카지마중공업에서 면허 생산한 기체라는 것도 확인했다. 이기연은 경성·인천·해주·대전·공주·강경·군산·전주·김천·안동·경주·문경 등 전국을 돌며 비행대회를 개최했는데 항공산업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줄기차게 역설했다.
1930년 유성기 음반을 녹음한 이진봉은 ‘만경창파 거기 둥둥 뜬 배, 게 잠깐 닻 주어라 말 물어보자’라며 긴 아리랑을 불렀다. 두 번째를 소환하는 초혼가는 아니었을까.
안태현 국립항공박물관장
yj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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