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사로 보는 세상] 암도 유발하는 '바이러스' 유래는 '독성물질'
바이러스가 암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한 라우스
1879년 미국 볼티모어 주변의 시골 마을에서 라우스(Francis Peyton Rous)가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지만 어머니는 3명의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1900년에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에 입학한 라우스는 해부학 실습중에 손가락에 상처가 생겼다. 이로 인해 결핵에 걸려 1년간 휴학을 하게 되었다. 라우스는 농업을 하는 텍사스의 삼촌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농촌생활에 친밀감을 가졌다. 여유로운 생활은 활동력이 커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라우스는 기초의학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더 공부를 했다. 귀국 후 록펠러재단의 지원을 받아 림프구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후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연구에 만족한 록펠러 연구소장에게 스카웃되어 평생 록펠러 연구소에 몸을 담게 되었다.
그 직후인 1909년 어느 날, 한 농부가 다리근육에 악성 종양(암)이 생긴 닭을 한 마리 가져왔다. 이 닭은 암의 원인을 찾는 일에 관심이 있었던 라우스에게 흥미를 촉발시켰다. 라우스는 암 조직에 뭐가 들어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액체질소로 조직을 냉동시키고 완전히 갈아버렸다. 이렇게 하면 세포는 모두 파괴되지만 세포내의 작은 물질은 남아 있게 된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박테리아(세균)를 분리하기 위해 여과지를 통과시키는 실험이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라우스도 이 방법을 사용했다. 세균은 여과지를 통과하지 못하므로 여과지위에 머물게 되고, 여과지 구멍보다 작은 물질은 여과지를 통과하는 것이다.
라우스는 암이 미생물 병원체에 의해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과지를 통과한 액체와 여과지를 통과하지 못한 물질을 별도로 암에 걸린 닭과 같은 종의 닭에게 주사했다. 그러자 여과지를 통과한 액을 주사한 닭에서는 암이 발생했으나 여과지를 통과하지 못한 물질을 주입한 닭에서는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았다.
라우스는 여과지를 통과한 바이러스가 암의 원인이라 결론내리고, 자신이 발견한 바이러스를 라우스 육종 바이러스(Rous sarcoma virus)라 명명했다. 그는 세포가 없는 여과액이 암을 일으킨다는 내용을 1910년 11월에 열린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고, 이듬해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로써 인류역사상 최초로 바이러스가 암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이 무시무시한 감염병을 일으킨다고?
미생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생물체를 가리킨다. 종류가 아주 많고, 그 많은 종류중 소수는 사람에게 감염병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미생물의 존재를 모른 채 살아왔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사이에 얀센(Zacharias Janssen), 말피기(Marcello Malpighi), 훅(Robert Hooke), 레이우엔훅(Antoni van Leeuwenhoek) 등이 독립적으로 현미경을 제작하여 맨 눈으로 볼 수 없는 대상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레이우엔훅은 다양한 시료를 현미경으로 관찰한 후 자신이 본 것을 그림으로 남겨 놓았다. 그가 남긴 그림 중에는 세균으로 생각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레이우엔훅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균을 본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는 그림만 남겼을 뿐 뭔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세월이 흘러 19세기 중반이 되면서 미생물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파스퇴르(Louis Pasteur)는 포도주를 잘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 미생물이 아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효모가 혼합되면 맛있는 포도주가 만들어지지만 세균이 오염되면 부패하여 먹지 못하게 되는 현상을 발견한 것이다. 오늘날 효모는 술이나 빵을 만들 때 발효시키기 위해 널리 이용되고 있다.
19세기 초반에 독일에서는 현미경을 이용한 새로운 발견이 이루어졌다. 1838년에 슐라이덴(Matthias Jakob Schleiden)은 식물이 세포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했고, 1839년에 슈반(Theodor Ambrose Hubert Schwann)은 동물도 세포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1850년대에 피르호(Rudolf Virchow)는 사람의 병이 세포의 이상에 의해 발생하므로 사람 세포를 관찰하면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1858년에 『세포병리학』을 출판했고, 이로써 세포병리학이 의학의 한 분야가 되었다.
이와 같이 독일에서는 다른 나라에서보다 현미경을 이용한 발견이 활발했다. 1876년 독일 농촌에서 개업의사로 일하고 있던 코흐(Robert Koch)는 주로 가축에게서 발생하는 감염병인 탄저의 원인이 되는 탄저균을 발견했다.
맨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세균이 덩치가 한없이 큰 동물과 사람을 감염시켜 죽음에도 이르게 할 수 있는 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코흐는 연구를 거듭하여 1882년과 1883년에 차례로 결핵과 콜레라의 원인균을 발견했다.
그는 특정 세균이 특정 감염병의 원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4원칙을 발표함으로써 후대 학자들의 세균학 연구에 등대 역할을 했다. 실제로 그의 이론을 따른 후대 학자들은 계속해서 여러 가지 감염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을 발견함으로서 세균학 발전에 박차를 가했다.
병이 생긴 부위에서 시료를 채취하여 적당한 용액으로 희석시킨 후 여과지를 통과시키면 여과지 구멍보다 큰 세균은 여과지를 통과하지 못한다. 따라서 여과지에 쌓인 시료를 감염병이 생긴 동물과 같은 종류의 동물에 주입하면 감염병이 발생하곤 했다.
호기심이 충만한 학자들은 여과지에 걸러진 물질은 물론 여과지를 통과한 용액도 별도로 동물에 주입하곤 했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용액을 동물에 주입한 경우에도 병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과지를 통과한 용액에 독성 물질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독성 물질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용어, 바이러스
바이러스, 세균, 진균(곰팡이와 효모 포함) 등은 미생물에 속한다. 바이러스는 스스로 증식을 하지 못하므로 생물체와 무생물체의 중간으로 취급하지만 미생물을 분류상 가장 작은 미생물이라 하기도 한다. 거대세포바이러스와 같이 아주 큰 바이러스가 있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는 바이러스가 가장 작은 미생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아서 사람이나 동물은 물론 세균에도 침입하여 들어가곤 한다.
바이러스는 여과지 구멍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작고, 전자현미경을 사용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 전자현미경은 1930년대가 되어서야 발견되었으니 19세기 학자들이 바이러스를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4세기 후반에 라틴어로 독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는 용어로부터 유래하여 virus(바이러스, 독성 물질), virulent(독성을 지닌)라는 용어가 영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에는 바이러스라는 용어가 “전염병을 일으키는 물질"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870년대부터 세균이 감염병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균학이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892년에 러시아의 이바노프스키(Dmitri Ivanovsky)는 담뱃잎에서 병을 일으키는 물질이 여과지를 통과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아냄으로써 바이러스가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처음 발표했다.
그리고 18년이 지난 후 라우스가 바이러스가 동물에게서 암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라우스는 암을 일으키는 물질을 보지도 못했고, 독성을 지니고 있음만 알았을 뿐 오늘날 알고 있는 바이러스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던 것이 그의 한계였다.
바이러스학의 발전과 사람에게서 여러 암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
19세기 중반에 미생물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미생물이 암을 일으킬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 학자가 등장했다. 그러나 가족 사이에서 암 환자가 흔히 발생하지는 않았으므로 이 이론은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자 종양이 생긴 동물로부터 조직을 소량 절취하여 다른 동물에 이식하면 종양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악성 종양인 암도 전파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라우스도 이에 관심을 가진 학자중 한 명이었다. 그랬으므로 농부가 육종에 걸린 닭을 가져다 주었을 때 적극적으로 연구에 임한 것이다.
라우스는 육종 조직으로부터 자신이 얻은 시료를 원하는 연구자들에게 보내주곤 했다. 그러나 관심을 가진 연구자들의 수요에는 크게 부족했다. 세균은 배양이 가능하므로 시료를 얼마든지많이 얻는 것이 가능했지만 바이러스는 그 때까지 배양이 불가능했다.
라우스로부터 시료를 받은 연구실에서는 닭에게서 육종을 일으키는 실험을 진행했지만 성공사례보다 실패사례가 더 많았다. 바이러스는 숙주세포내로 들어가지 않으면 생존이 쉽지 않으므로 시료를 전해주고 받는 과정에서 죽거나 약해질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후속 성과가 없자 1915년부터는 라우스도 암 연구를 중단하고 다른 주제로 관심을 돌렸다. 1930년대에 쇼프(Richard Edwin Shope)는 야생토끼에게서 피부섬유종과 유두종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루케(Baldwin Lucké)는 바이러스가 개구리의 선암을 일으킬 수 있음을 발견했고, 비트너(John Joseph Bittner)는 바이러스가 생쥐에게서 유방암을 일으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동물의 다양한 암이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함이 알려졌다.
1951년에는 그로스(Ludwik Gross)가 생쥐에서 백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발견했다. 또 사람에게서 암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도 발견되기 시작했다.
1966년에 라우스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 실험을 통해 바이러스가 암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학술대회에서 발표한지 56년만의 일이었다. 이는 노벨 생리의학상 역사에서 연구업적을 낸 후 노벨상을 수상하기까지 가장 오래 걸린 연구업적이며 43년이 걸린 2등보다 무려 13년이 더 걸렸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한 것은 라우스의 연구업적이 바이러스학 분야의 발전보다 너무 앞서갔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를 볼 수도 없고, 배양도 할 수 없는 시기에 획기적인 업적을 냈지만 검증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시대를 너무 앞서가면 인정을 받을 때까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태어나서 87년간 살았으므로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87세의 나이는 7년 후인 1973년에 동물행동을 연구한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프리슈(Karl Ritter von Frisch)와 함께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중 최고령 기록이기도 하다.
라우스 육종 바이러스가 사람에게서 암을 일으키는 것은 증명되지 않았지만 200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하우젠(Harald zur Hausen)의 업적이 “자궁경부암을 일으키는 사람 유두종 바이러스의 발견”이라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바이러스는 사람에게서도 암을 일으킨다. 이외에도 Ebstein-Barr Virus, B형 간염 바이러스, C형 간염 바이러스, 사람 T 림프구 바이러스 등이 암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1. John T. Schiller, Douglas R. Lowy. An Introduction to Virus Infections and Human Cancer. Recent Results in Cancer Research. 2021;217:1-11.
2. Gregory J. Morgan. Cancer Virus Hunters: A History of Tumor Virology.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2022
3. 노벨 재단 홈페이지. www.nobelprize.org/prizes/medicine/2008/hausen/facts/
4. Online Etymology Dictionary. https://www.etymonline.com/search?q=accountability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대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의학교육학과 교수 ]
Copyright © 동아사이언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