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착] 헬렌 켈러, 일제강점기 한국 와서 책상 사 갔다
1937년 7월 14일. 헬렌 켈러. 사무용 책상 구입.
- 태평로에서 고미술품을 팔던 사무엘 리 씨의 고객 장부 中 -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부터 약 20년간 국내에서 우리 문화재를 구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인 정보를 담은 '고객 장부'가 세상에 공개됐습니다.
장부 명단에는 특히 장애를 극복한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의 이름도 눈에 띕니다.
국내 고미술품을 구입한 고객 장부의 등장으로 우리 문화재가 어떻게 해외로 반출되었는지, 그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국외소재문화재단은 한국 문화재 소장가인 미국인 로버트 마티엘리(97) 씨로부터 우리 문화재 관련 자료 3건, 총 60점을 기증받았다고 19일 전했습니다.
이번에 기증받은 자료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국내에서 우리 문화재를 사 간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인 고객 장부를 비롯해, '국민 화가'로 불리는 박수근의 개인전 리플릿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티엘리 씨가 기증한 자료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을 '거래 장부'입니다.
서울 중구 덕수궁 맞은편 태평로에서 고미술상을 운영한 사무엘 리 씨가 기록한 것으로 확인된 이 장부는 1936년부터 1958년까지 약 22년간 거래 품목 내용을 기록한 자료입니다.
영어가 유창했던 사무엘 리 씨는 한국에서 주로 외국인을 상대로 고미술품을 판매하며 장부를 기록해왔는데, 이 장부에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전쟁기를 거치는 동안 그에게 한국 미술품을 사간 수백 명의 서양인과 일본인 고객의 이름, 판매 일자, 주소, 품목 등이 적혀있습니다.
고객 중에는 장애를 극복한 사회운동가로 유명한 헬렌 켈러(1880~1968)의 이름도 확인됐습니다.
헬렌 켈러는 1937년 7월 일제 식민지 조선을 방문해 서울, 평양 등에서 강연을 했는데 7월 14일 사무엘 리 씨에게 '서안'(Writing Desk · 책을 펴 보거나 글씨를 쓰는 데 사용하는 책상)을 하나 구매한 사실이 장부에 나와있습니다.
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이 장부는 현재까지 알려진 '최대 규모의 한국 문화재 구입 외국인 명단'으로 확인됐습니다.
이번에 기증한 자료에 눈에 띄는 것 중 또 하나는 바로 '국민 화가'로 불리는 박수근(1914~1965)의 개인전 리플릿입니다.
1962년에 열린 박수근의 개인전을 소개하는 리플릿에는 기존에 알려진 자료와 비교해 작품 11점의 목록이 더 나와 있습니다.
미8군 SAC 도서관에서 열린 박수근의 개인전은 유화 45점이 출품된 것으로 추정되나 기존에는 33번 목록까지만 알려졌습니다.
박수근의 전시를 연구해 온 서성록 안동대 교수는 "추가 11점 목록은 박수근의 SAC 도서관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 전체를 복원하는 데 필요한 정보"라며 사료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재단은 올해 6월부터 마티엘리 씨 부부가 수집한 한국 문화재를 연구·조사하면서 그가 소장한 문화재가 2천여 점에 달한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주요 자료 기증을 끌어냈습니다.
재단은 향후 '마티엘리 컬렉션' 관련 연구를 진행해 학술적 성과를 공개할 예정입니다.
재단 관계자는 "그간 여러 차례 한국 문화재를 기증했던 이전 행보를 잇는 또 한 번의 의미 있는 결정"이라며 "자료의 보존·관리를 위해 유관기관과 협의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한편, 마티엘리 씨는 도난당했던 18세기 불화 '송광사 오불도'를 2016년 우리나라에 돌려보낸 인물입니다.
1958년부터 1988년까지 약 30년간 한국에서 지낸 그는 주한 미8군 사령부의 문화부 미술공예과장 등으로 일하며 한국의 병풍, 자수, 도자기, 목공예품 등 다양한 문화재를 수집해왔습니다.
부인 샌드라 마티엘리(96) 씨와 함께 한국에서 모은 문화재는 1천946점에 이릅니다.
마티엘리 부부는 그간 포틀랜드 미술관, 오리건대 조던슈니처 미술관, 시애틀 미술관 등에 소장품을 기증하거나 기탁해왔는데, 이런 '마티엘리 컬렉션'은 지금도 각 기관 한국 전시실에서 주요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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