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우린 지금 스태그플레이션 담장 위를 걷고 있다
"왜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하세요!"
지난 달 9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고위 관계자가 웃으며 타박한 말입니다. 하반기 경제전망을 사전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저의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KDI는 현재 우리나라가 스태그플레이션에 진입했다고 보는지요?" 이 한 문장이 어려웠다면, 그건 질문에 담긴 함의 때문일 겁니다. 정부 국책기관인 KDI로서는 정부가 사력을 다해 막고 있는 위험한 불청객이 그것도 두 명이나 안마당에 발을 디뎠다는 걸 인정하는 셈일 테니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타박이었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경보음은 이미 하반기부터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스태그네이션(경기 침체) 하나만 와도 죽을 맛인데 인플레이션(물가 상승)까지 겹치니 당장 취약 계층에서부터 곡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기라 돈은 좀 풀긴 했어도 나라 곳간 열어젖혀 펑펑 쓴 일도, 화폐 마구 찍어내 뿌린 적도 없는데 스태그플레이션이라니!
경보음 초기만 해도 재정당국은 "글쎄요…"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소비가 살아나고 있고 수출 실적도 지표상 좋아지고 있는데 '아직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하기엔'이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그러다 올해 무역수지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처음으로 석 달 연속 적자라는 몽둥이를 맞자 자세를 고쳐 잡기 시작했습니다. 11월 들어 신성장 수출 동력 확보, 역동적 벤처 투자 생태계 조성 등 대책들을 쏟아낸 배경입니다. 21일 발표되는 <2023년 경제정책방향>에서도 다양한 대책들이 나올 예정입니다.
물론 정부로서도 억울한 부분이 있을 겁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렇게 장기화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자기부터 살고 보자는 미국의 긴축 정책에 우리 손발은 꽁꽁 묶였고, 중국은 왜 또 저렇게 저성장 속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지. 기름값 잡겠다고 연간 5조 원을 마련해도 경유값은 잘 안 떨어지고 있습니다. 10월부터는 지난해와 비교해 서민들의 연료, 등유가 64% 정도나 뛰었습니다. 정말 세계 곳곳에서 한반도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폭탄을 쏘아대고 있습니다. 이걸 하나하나 요격하기엔 타이밍도 실력도 부족합니다. 쏘아 맞춰 떨어뜨리기는커녕 비켜가기만을 바라는 게 최선의 상황일 정도입니다.
대공황에 버금가는 경제적 혼돈의 시대입니다. 이런 경제적 부조리 상황에서 칼 막스라면 서민들에게 봉기하라고 재촉했을 테지만 그보다는 케인즈식 해법이 타당합니다. 당장은 못 미더울 수 있지만 정부가 제대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랄 수밖에 없겠죠. 그게 정부의 존재 이유이니 말입니다.
다시 돌아와 그날 제가 그런 '쉬운' 질문을 던진 이유는 사실 KDI 경제전망 보고서 안에 있었습니다. 187쪽에 달하는 보고서에는 경기 둔화, 물가 상승이라는 단어가 곳곳을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가가 정점을 지났다지만 상방 압력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경제 엔진은 꺼져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가 "사실상 스태그플레이션에 진입한 거 아닌가"라고 반문할 정도입니다.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 역사적으로 두 명의 불청객을 동시에 잡는 대책은 단언컨대 없었습니다. 세계 유수한 석학들마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선 멱살을 잡아 내 집 밖으로 끌어낼 것부터 정해야 합니다. 보통은 우선순위가 물가입니다. 이 녀석은 날쌔지만 덩치가 작고 쉽게 지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물에 견주면 치타 정도랄까요. 당장은 온 마당을 이리저리 휩쓸고 다니며 사람들 혼을 쏙 빼놓습니다. 이런 때에는 어린 아이, 노인 같은 취약자들을 방으로 옮겨 보호하면서 남은 사람들끼리 함정을 파고(세금 핀셋 인하 등) 올가미를 쳐놓는 등(금리 인상 등) 촘촘한 대책을 세워서 물가라는 녀석의 힘을 점점 빼는 게 옳다고 학계는 믿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이, 우리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죠. 미국의 경우 사상 처음으로 네 차례 연속 '거인의 발걸음'으로 여기저기 튀어 오른 물가를 밟아 누르고 있는 중입니다. 미 금리와 동조화해야 하는 우리로서도 선택지가 없습니다.
일단 물가를 바깥으로 내몰았다면 이제는 경기 부양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경기 부양이라는 놈은 거대한 슬라임 같아서 손에 쉬이 잡히지도 않고 잡아도 집밖으로 던져버리기엔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게다가 물가가 밖에서 호시탐탐 다시 들어올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적당한 인원을 담장에 배치해(금리 인하 속도 조절 등) 문단속을 철저히 하면서 유기적 살라미 전략(기업/가계, 수출/수입, 금융, 외환 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수립 시행)으로 차분하게 맞서는 게 방법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최근까지 가장 논란이 됐던 정부의 법인세 인하 방침입니다. 투자 많이 하라고 세금 깎아주겠다는데 내년에도 세계 경제가 암울하다는 전망이 천지입니다. 기업으로선 당연히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권에서는 "투자를 안 해도 마땅한 페널티가 없는 상황에 기업이 투자를 하겠느냐", "그게 바로 부자감세"라며 채찍질입니다. 어느 정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적 경기 침체 상황에서 투자 안 한다고 쥐어 팰 때가 아닙니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가 그래도 믿을 것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겠거니 생각하는 기업'입니다. 따라서 투자에 나서는 기업들에 특별세액공제 같은 당근을 더 쥐어주는 방안을 고민해야 할 시점입니다.
경기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 취약계층은 광산의 카나리아 같은 존재입니다. 경제 정책을 들고 백 개, 천 개를 저글링 해도 절대 떨어뜨려서는 안 될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취약 계층 보호와 그들의 대한 핀셋 지원'이어야 합니다. 그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고 그거 하라고 대부분의 국민이 꼬박꼬박 세금을 잘 내고 있는 겁니다. 내년도 '경제정책방향'이 뜬구름 잡는 구호가 아닌 절실하고도 즉각적인 나침반이길 바랍니다.
참고: 이 취재파일은 월간 <정책이 보이는 도서관>에 기고한 글을 일부 수정한 글임을 알립니다.
조기호 기자cjkh@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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