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일상속으로” 그린라이트 ‘기아 초록여행’ 10년사

2022. 12. 20.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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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함께 장애인 가족 여행 지원해 온 한정재 그린라이트 상임이사 인터뷰

[비즈니스포커스]

한정재 그린라이트 상임이사. 사진=서범세 기자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은 뒤 20년 간 두문불출했습니다. 그 사이 암이란 병까지 찾아왔죠. 내 생애 마지막 여행을 가고 싶었습니다. 초록여행 덕분에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초록여행 후기 중에서-

초록여행은 기아의 지정 기부를 통해 사단법인 그린라이트가 진행 중인 장애인 여행 지원 사회 공헌 사업이다. 2012년 6월 출범해 10년간 장애인 여행을 지원하고 있다. 기아가 기부금을 대고 그린라이트가 실무를 맡는 식이다. 그간 장애인 여행은 버스를 기반으로 한 패키지형 단체 여행에 한해 지원됐지만 초록여행 출범 이후 가족과 자유 여행 기반의 여행이 됐다. ‘여행’이 장애인 일상의 무엇을 얼마만큼이나 바꿀 수 있을까. 초록여행의 기획자이자 실무자인 한정재 그린라이트 상임이사를 만나 ‘기아 초록여행’ 10년의 의미를 되짚었다.


시혜적 사업에서 자기선택권 보장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너라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 틈에 섞여 명찰을 달고 같은 옷을 입고 현수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싶을까.”

한정재 그린라이트 상임이사는 2012년 초록여행의 탄생의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그는 에이블복지재단에서 관공서·기업 등과 손잡고 장애인 단체 여행을 지원하는 사업을 담당했다. 단체 여행은 지원자를 추려 선발하는 방식이었다.

“한국에서 장애인 여행은 일시적인 사회 공헌 활동이에요. 여행을 가려면 ‘뽑혀야’ 하기 때문에 장애 등급이 조금 더 높을수록, 사연이 조금 더 슬플수록 가능성이 높았어요. 관광 향유 이면에 차별적 요소, 시혜적 진행이 존재했습니다. 그런 여행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고민하던 무렵 기회가 왔다. 2011년 말 기아에서 장애인 여행 사업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보다 장애인 여행을 고민한 이는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머릿속 생각을 곧바로 제안서에 적어 넣었다. ‘여행에는 장애 유형도, 등급도, 소득도, 지역에도 격차가 없어야 한다. 장애인 여행은 단체 여행이 아니다. 개별 가족 여행이 돼야 하고 본인이 원할 때 자유롭게 여행을 가야 한다.’

복지관 이용자 중심의 단체 여행에서 가족 여행 중심의 콘셉트는 획기적이었다. 그의 제안서가 발탁됐다. 2012년 기아 초록여행의 탄생이다. 기아 초록여행은 유형, 장애 정도, 소득 등을 기준으로 하지 않았다. 여행 신청은 등록 장애인과 준하는 사람(국가유공자, 상이군경, 산재 상위 등급)은 누구나 사용하고 떠나고 싶은 날에 원하는 차종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운영돼 자기 선택권을 보장했다. 다만 휠체어 사용 여부, 저소득 여부를 통해 연간 사용할 수 있는 일정을 추가로 제공하고 있다. 여타의 사회 공헌과 달리 사진이나 후기 등을 의무로 하지도 않는다.

전에 없던 서비스의 출범은 입소문을 탔다.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초록여행의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당시 담당자였던 한 이사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왔다. 초록여행을 중심으로 이동권 문제에 특화된 사단법인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장애인에게 이동권은 주요한 문제입니다. 초록여행을 계속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컸죠. 뜻이 맞는 분들과 함께 사단법인을 창설했습니다.” 사단법인 그린라이트는 취약 계층의 삶에 초록 신호등이 켜진다는 뜻의 모빌리티 전문 비영리 기관이다. 기아와 함께 장애인 여행을 지원하는 초록여행, 현대차그룹과 함께 수동 휠체어를 전동처럼 사용할 수 있게 키트를 제공하는 셰어링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초록여행은 그린라이트의 대표 사업이다. 2012년 초록여행 서울 서비스 개시를 시작으로 부산·광주·대전·경기(성남)·강원(강릉)·제주로 서비스 범위를 넓혀 왔고 16대의 장애인 편의 차량(카니발 15대, 레이 1대)을 운행하고 있다.

“일반 승용차는 전동 휠체어가 반입이 안 돼요. 무게만 최소 80kg에서 120kg이 넘죠. 들어올릴 수도, 넣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수동 휠체어를 갖고 여행을 하면 장애인과 보호자 모두 여행이 아니라 고난의 행군이 되는 겁니다. 동행이 없는 장애인이 수동휠체어를 혼자 사용하는 것은 더욱 어렵고요.”


대중교통을 탄다면 어떨까. 한 이사는 사실상 불가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에서 전동 휠체어를 가지고 갈 수 있는 여행의 방법은 열차 그리고 최근에야 고속버스 부산 강릉 등 4개 노선에만 투입되었는데 열차와 버스에서 내려 그다음으로의 이동이 불가하다는 것이다. 장애인 콜택시는 차량 수가 한정적이고 최소 1시간 이상 대기해야 한다. 수도권을 벗어난다면 대기 시간은 더 길어지기 마련이다.

기아 초록여행이 지원하는 최신형 올뉴카니발 차량에는 전동 휠체어를 쉽게 수납할 수 있는 리프트와 하지 장애가 있는 운전자가 편이 사용할 수 있는 핸드 컨트롤러 등이 장착돼 있다. 또한 차량 승하차가 어려운 장애인의 편의를 위해 전동식 회전 시트를 전 차량에 장착해 차량 외부에서 휠체어에서 바로 좌석으로 옮겨 앉아 차량 내부로 이동할 수 있도록 편의성을 도모하고 있다. 여기에 24시간 대기 운영되는 초록여행의 비상 연락 시스템은 여행 기간 중 발생하는 각종 사고에 대한 불안감을 경감시켜 준다.

“늘 조마조마합니다. 눈이 조금만 와도 혹 사고가 나지는 않을까 잠못 이루는 날들이죠. 우리가 지난 10년간 7만여 명의 고객을 모시면서 가장 기뻤던 일은 입원한 고객이 단 한 분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것도 경상이었죠.”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초록여행은 2012년 6월 출범 이후 현재까지 장애인 가족 약 7만4000여 명에게 여행의 기회를 제공했고 휠체어 탑재가 가능한 초록여행 차량의 누적 운행 거리는 460만km를 넘어섰다. 지구에서 달까지(약 38만km) 약 6번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10년간 초록여행은 일반 교통수단으로 자유로운 이동이 어려운 장애인 여행의 벽과 턱을 허물었다. 일반 차량으로는 여행이 곤란한 지체·뇌병변 장애인의 이용이 전체의 77.1%를 차지하며 보행 불편 장애인의 대표적인 여행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전체 이용자 중 휠체어 사용자의 이용 비율이 전체 이용자의 35%에 달한다.

“초록여행 홈 페이지를 통해 후기를 기록한 많은 분들은 다년간 이루지 못했던 희망을 이뤘다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결혼 후 20년 만에 처음으로 신혼 여행을 떠난 부부, 부모님의 임종을 지킬 수 있게 된 자식, 60년 만에 고향 부모님 산소를 방문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초록여행이 지원하는 서비스가 이동과 교통수단 이상의 가치를 창출해 내는 것을 방증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당사자가 느끼는 자기 만족도와 삶의 가치 실현은 인권 그 이상의 가치입니다.”

여행에서 뻗어나간 가지는 법 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 여행지를 방문하며 장애인 편의 시설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장애인 화장실, 장애인 승강기, 경사로, 장애인 전용 주차 출입구 단차 등의 문제가 법 제도를 개선하지 않고서는 이동권 개선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초록여행은 장애인 관광권 보장을 위해 다양한 입법 활동을 진행하며 고 노회찬 의원을 통해 2017년 장애인복지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에 ‘장애인 관광 활동’ 조항을 반영하는 데 성공했다. 관광 활동에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사회 공헌에서 일반 소비층으로의 전환 

“초록여행 사업의 이러한 성공에는 10년간 한결같이 지원하는 기아의 힘이 컸습니다. 기아는 그간 누적 104억1000만원을 기부했습니다. 한국 장애인 관련 사회 공헌 사례에서 특정 기업이 특정 분야에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100억원이 넘는 기부를 하고 품질 관리를 지속하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기아 초록여행은 기아의 지정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사업이지만 기아는 다양한 사회각계의 참여도 함께 추진하고 있다. 그린라이트 역시 우리 사회 전반이 장애인 관광에 관심을 갖도록 기관과 기업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그린라이트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아·제주항공·한국철도공사·한화호텔앤리조트·그린라이트는 ‘장애인 여행 활성화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각 사와 연계한 프로그램 ‘패키지 여행’을 제공하고 있다. ‘패키지 여행’은 차량·유류·여행 활동비뿐만 아니라 왕복 항공권 또는 기차권과 2박 숙박권까지 지원되는 프로그램이고 2024년까지 190팀, 760명에게 제공될 예정이다.



“2023년에 바라는 게 있다면 서비스의 확장입니다. 훨씬 더 많은 기업과 단체가 장애인과 연결된다면 더 이상 사회 공헌의 개념이 아니라 장애인 역시 (기업의 관점에서) 일반 소비층에 진입할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여행사에서도 ‘장애인 추천 여행 상품’을 소개한다면 어떨까요. 대한민국이 바뀌지 않을까요.”

초록여행은 지난 10년간 장애인 여행의 새로운 여행 패러다임을 만들어 왔다. 앞으로의 10년은 여행을 넘어 일상 속에서 장애인 이동권을 위해 다양하게 지원할 계획이다. 예컨대 장애인 구직자가 면접을 보러 갈 때 초록여행 차량을 지원하고 사회적 협약을 통해 면접에 필요한 의류와 메이크업 등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10년간 초록여행을 운영하면서 한국에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모빌리티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1박 2일 이상의 여행에 그쳤습니다. 앞으로는 특별한 일상으로 들어갈 겁니다. 면접·결혼·출산·장례 등 장애인의 일상에 초록여행과 함께하는 특별한 하루를 제공하는 거죠.”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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