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보따리’ 앞다퉈 푼다던 대기업들, 7개월 만에 뒷걸음질
삼성전자·LG전자 등 3분기 가동 줄여
4분기부턴 반도체 등까지 확산 전망
“내년 투자·채용도 예년보다 줄여야만”
“지난해에 비해 프리미엄 제품용 부품 생산은 같은 수준이지만, 범용 부품은 절반 수준이다. 내년 채용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삼성 전자계열사 관계자)
“투자를 이어가고 싶어도 이자 부담이 커졌다. 내년에는 불요불급한 것이 아니면 투자를 이연하거나 지연할 계획이다.”(에스케이(SK) 계열사 임원)
“올해 시작된 적자가 내년엔 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지만, 기존 투자는 유지하되 신규 투자는 안 한다는 방침이다.”(롯데 계열사 임원)
경기둔화가 현실화하면서 주요 기업들의 굴뚝이 식어가고 있다. 휴대전화·가전·석유화학 등 주요 업종은 이미 3분기 가동률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뚝 떨어졌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등도 시황 악화 전망에 따라 가동률이 낮아질 것으로 점쳐진다.
공장 가동률 ‘뚝뚝’
19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를 보면, 스마트폰·차량 부품을 생산하는 삼성전기 컴포넌트부문의 3분기 가동률은 65%로, 전년 동기 대비 30%포인트 낮아졌다. 지난해에는 100개를 생산할 수 있는 시설에서 95개를 생산했는데, 올해는 65개만 생산하며 일부 시설을 놀리고 있다는 뜻이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 축소 여파다. 삼성전자 스마트폰 공장 가동률은 72.2%로, 전년 동기 대비 8.1%포인트 떨어졌다. 내년 세계 스마트폰 시장은 올해보다 더 위축될 전망이어서 이들 업체의 공장 가동률 하락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티브이(TV)·세탁기 공장 사정도 다르지 않다. 엘지(LG)전자 3분기 티브이 공장 가동률은 81.1%로, 전년 동기 대비 15.3%포인트 하락했다. 세탁기 공장 가동률은 88%로, 17%포인트 떨어졌다. 엘지전자 관계자는 “3분기부터 주요 제품에 들어가는 부품의 재고가 많아져 재고 조정에 들어갔고, 이에 따라 앞으로도 더 낮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디스플레이 쪽도 마찬가지다. 엘지디스플레이 구미공장 가동률은 95%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5%포인트 줄었는데, 2분기부터 지속된 적자로 계속 떨어질 처지다. 삼성에스디아이(SDI) 엘시디(LCD)패널에 쓰이는 편광필름 공장 가동률도 78%로, 22%포인트 하락했다. 전세계 티브이 시장 위축 영향이 크다. 삼성에스디아이 반도체 패키징 소재(EMC) 공장 가동률은 29%로, 21%포인트 줄었다.
삼성전자 반도체 가동률은 에스케이(SK)하이닉스와 나란히 100%를 유지했지만, 가격 하락에 따른 생산 조정으로 앞으로는 가동률 하락을 피할 수 없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석유화학 업종을 대표하는 엘지화학과 롯데케미칼의 공장 가동률도 낮아지고 있다. 플라스틱 등을 생산하는 엘지화학 석유화학부문 공장 가동률은 84%로 9.7%포인트, 롯데케미칼의 합성수지(PC) 공장 가동률은 86%로 16%포인트 하락했다.'
투자·채용은 ‘꽁꽁’
공장 가동률 하락은 기업의 실적이 계속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이미 내년 투자를 올해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밝혔고, 엘지디스플레이는 일부 직원을 상대로 다른 계열사 전배 신청을 받은 데 이어 자율휴직까지 검토 중이다. 지난 5월 윤석열 정부 출범에 맞춰 삼성이 향후 5년간 450조원(국내 360조원) 투자와 8만명 채용을 약속하는 등 1천조원이 넘는 투자와 대규모 채용을 약속하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삼성·에스케이·엘지 등 주요 그룹들은 당시 발표대로 투자와 고용 계획을 이어가겠다고 밝히고 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한겨레>에 “가전 사업부를 중심으로 채용을 늘릴 계획이며, 투자 역시 발표대로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에스케이그룹과 엘지그룹 관계자는 “실적이 안 좋은 계열사에서 일부 조정은 있을 수 있지만, 향후 성장을 위한 투자는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미래 성장에 꼭 필요한 투자는 차질 없이 진행할 계획이지만, 내년 경영환경을 고려해 신규 투자는 필요할 경우 재검토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계열사 내부 분위기는 그룹의 공식 입장과 차이를 보인다. 삼성의 전자 계열사 관계자는 “가동률이 앞으로도 낮아질 상황인데다 맏형 격인 삼성전자가 긴축 경영을 강하게 하고 있어서 계열사 역시 투자와 고용을 줄일 처지”라고 말했다. 또 다른 삼성전자 관계자는 “대규모 구조조정은 없었지만 휴대전화 사업부 등에선 일부 인력이 줄었다”고 말했다. 엘지전자 관계자는 “경기 악화로 내년 마케팅 비용이나 연구개발비 등에 조정이 있었다”고 말했다. 에스케이 계열사 관계자는 “금리 부담이 커진 상황에서 신규 투자를 모두 재검토하고 있고, 채용 역시 예년에 비해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은 협력업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삼성디스플레이와 스마트공장 구축을 위한 협의를 진행해온 한 협력업체 관계자는 “올 상반기만 해도 스마트공장 구축을 위한 솔루션 계약을 체결할 것처럼 보였지만, 하반기 들어서는 보류하겠다고 알려왔다”며 “내년엔 아예 없던 일이 될까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경기도 용인의 한 반도체 협력업체 관계자는 “에스케이하이닉스로부터 나오는 물량이 이미 줄었는데, 내년엔 이보다 더 줄일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결국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국의 봉쇄 등 올 초 불확실성이 커졌는데도 ‘정부와 조율해’ 대규모 ‘장미빛’ 투자 계획을 앞다퉈 내놓았다가 7개월 만에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는 모습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는 증권사 분석가는 “최근 한 달 정도의 기간 동안 업황에 대한 우려가 급격하게 나빠졌다”며 “경기 침체 우려 속에 대기업들이 약속과 달리 내년 투자와 채용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안태호 기자 ec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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