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동원 피해자 아버님의 억울함 씻고 기쁨의 눈물 쏟겠습니다
이지현 5·18부상자동지회 초대회장, 시인, 연극인
아버님. 당신은 지지리도 못난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과 싸우다 총각을 벗었으나, 신혼의 달콤함은커녕 일본 오사카 후지나가타 조선소로 끌려가셨다죠?
죽도록 고생하다 해방을 맞아 1945년 10월에 고향의 봄을 부르며 전남 화순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것도 잠시, 6·25를 만나 낮에는 군인과 경찰, 밤에는 빨치산에 시달렸고, 급기야 빨갱이로 몰려 몽둥이세례를 받아 ‘똥물 요법’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들었습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죠. 5·18이란 괴물의 습격을 받아 큰아들이 다치고 둘째 아들은 상무대로 연행됐죠. 어머님은 반미치광이가 돼 여동생 인숙이를 5·18 유가족에게 시집보냈죠. 행복을 염원했던 동병상련의 결혼은 83년 ‘5·18묘지 이장 음모’ 획책 사건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렸습니다. 동족상잔의 슬픔 고인 화학산 기슭에 동생을 묻고 오던 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먼 하늘만 바라보던 당신. 당신은 그때부터 화병이 났고 술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다 2002년 사월 초파일 하늘여행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얼마 뒤 한일월드컵이 열렸습니다. 온 국민의 성원 속에 광주 월드컵경기장에서 4강 신화를 창조했죠. 그날 밤 풍물패와 어울려 빛고을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희열을 만끽했습니다. 왜 뜬금없이 월드컵 타령이냐고요? 그럴만한 이유가 생겼죠. 2022년 태극전사들은 포르투갈을 꺾으며 12년 만에 16강에 진출했습니다. 비록 8강에 합류하진 못했으나 이강인 조규성 백승호 등 신예들에게서 희망을 봤습니다. 특히 아버님처럼 일제강점기 일본인 교장 꼬임에 빠져 근로정신대에 끌려가신 어느 할머님이 2022년 대한민국 인권상(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자로 결정했다는 소식은 올바른 역사 평가를 기다리는 국민에게 감동이지 않았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희생자들도 손뼉 칠 일이죠? 그렇죠, 아버님? 그래서 불효자식이 아버님께 글을 올리게 됐습니다.
평범한 사람이었던 소생은 80년 5월을 통해 국가관과 가치관이 형성됐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의 고통과 함께하기로 결심했고,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시민모임)에 힘을 보탰죠. 그러던 2020년 1월17일 일본 양심적인 활동가들의 ‘금요행동 500회’ 집회를 응원하기 위해 출국했습니다. 미쓰비시중공업과 일본 외무성 앞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상징인 양금덕 할머니를 비롯한 30여 분과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외치는데, 아버님과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떠올라 눈물이 날 수밖에요. 일본의 사죄와 배상 요구 투쟁은 고인이 되신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님이 주도했습니다. 양금덕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수차례 일본을 오가며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밀린 임금 지급을 요구했으나 번번이 패소했습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재판을 시작했고 마침내 26년 만에 대법원에서 승소판결을 얻어냈죠. 그러나 미쓰비시중공업이 손해배상을 거부해 국내 재산을 매각하는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원만한 외교협상을 위해 대법원에 최종판단을 미뤄달라는 의견서를 제출했습니다. 하여 강대국들 눈치만 살핀다는 빈축을 샀죠.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권리회복을 위한 양금덕 할머니의 노고를 인정해 9월부터 서훈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자 중 한분으로 선정됐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양금덕 할머니가 거주하는 곳에 들려 사진을 찍기도 했던 외교부(장관 박진)가 사전협의가 필요하다며 딴지를 걸어 서훈안이 국무회의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한편의 저질 코미디 같죠?
아버님. 시민모임이 주최한 11일 이금주 전 회장님 1주기 추모제를 모시며 유훈을 받들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인권상이 아닌 ‘우리들의 인권상’을 양금덕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94살 양금덕 할머니와 참석자들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합창하며 행복을 마셨습니다.
그립고 존경하는 아버님. 소생은 어머님 빈소도 지키지 못했고, 아버님의 억울한 역사를 씻겨드리지 못한 죄인입니다. 조국의 현실은 슬프고 울화통 터집니다. 그러나 절대 울지 않겠습니다. 부끄러운 사람이 아닌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 민주 통일 영령들과 기쁨과 희열의 눈물 쏟고 싶습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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