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태고지 교회 봉헌 韓성화 … 색동옷 예수 · 쪽빛치마 마리아에 벅찬 가슴[장재선 선임기자의 예술 순례]

장재선 기자 2022. 12. 20.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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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나사렛 성모영보성당(수태고지교회)의 회랑 벽면에 한국의 이남규 작가가 만든 성모자상이 봉헌돼 있다. 장재선 선임기자
이스라엘 나사렛 성모영보성당(수태고지교회)의 뜰을 한 수녀가 걸어가고 있다. 장재선 선임기자
이남규(오른쪽) 작가와 이 작가가 이스라엘에서 성모자상 작업을 할 때 도와준 안베다 신부.
이남규 작가의 유리화 맥을 잇는 서울 성북동 공방에서 정웅모(왼쪽) 신부와 이 작가 딸 윤주(오른쪽) 씨, 사위 박정석 씨가 공방 교습생의 작품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장재선 선임기자의 예술 순례 - (8) 이스라엘 나사렛 ‘성모영보성당’

한국 스테인드글라스 선구자

고 이남규 작가 1979년 제작

작품 놓일 벽면 햇빛 안 들어와

유리화 대신 모자이크 그림으로

청 · 적 · 황 원색 과감하게 사용

정겨운 모습 속에 기품 배어나

이 작가, 전국 50개 성당에 작품

유족들 공방 만들어 유리화 계승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을 응원할 때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지난달 말 이스라엘 나사렛의 ‘성모영보(聖母領報)성당’에서 한국 성화(聖畵)를 보며 그랬다. 세계 50여 국가에서 봉헌한 성모자(聖母子) 그림이 교회 벽면에 걸려 있는데, 한국 작품이 우측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음이 뿌듯했다. 이 성당은 성경의 기록을 따라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아이를 잉태할 것을 알려준 장소에 세운 것이다. 흔히 ‘수태고지(受胎告知) 교회’로 알려져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모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 묵상하는 곳이다. 그런데 뜻밖에 ‘애국심’이 솟구친 것은, 한국 성화를 여기에 봉헌한 이들의 마음이 작품에서 오롯이 만져졌기 때문일 것이다.

△ 한국적 종교 미술의 구현

가로 4m, 세로 2.5m쯤의 성모자상은 고 이남규(1931∼1993) 작가가 1979년에 제작한 것이다. 작가 이름 이외에 그 제작 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인 정웅모 신부가 소상히 알고 있었다. 정 신부는 이 작가의 작품에 대해 연구하며 작가의 부인 조후종(명지대 명예교수·87) 여사 등 유족과 주변 인물들을 만나 알게 된 내용을 전해줬다.

그에 따르면, 이 성모자상은 천주교 신도였던 송호림(1923∼1996) 씨가 제작을 지원했다. 송 씨는 1970년대 말 성지 순례로 이 성당을 찾았다가 세계 각국의 성모자상이 있는데 한국 성화만 없는 것이 아쉬워서 귀국 후 소속 성당을 통해 추진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확인된 바 없으나, 생몰연도로 볼 때 육군 중장 출신의 정치인으로 추정된다.

작품을 만든 이 작가는 추상 회화 거장이자 한국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 즉 유리화의 선구자다. 자연 이미지를 많이 반영하는 그의 그림은 문학성과 조형성의 조화를 지향했다. 그가 공주사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 미대에 들어가 장욱진으로부터 서양화를 배운 것이 그 바탕을 이룬다. 그는 공주교육대 미술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8년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가 시토 수도회의 슐리어바흐 공방에서 유리화를 공부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에서 조르주 루오의 가족, 화가 알프레드 마네시에 등과 교우했다. 1970년 귀국해 전국 각 성당의 유리화 작업에 응하며 자유분방하면서도 서정성이 풍부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부인 조 여사에 의하면, 성모영보성당의 작업 의뢰가 들어왔을 때 이 작가는 건강이 나빠 망설였다. 그러나 평소 알고 지냈던 안베다(한국 이름 안선호) 신부가 이스라엘에 거주한다는 것만 믿고 용기를 내어 출국했다. 현지에서 안 신부의 도움을 받으며 작업했는데, 성당 내부는 다른 나라 성모자상이 차 있는 탓에 외부 복도 벽면에 부착해야 했다. 벽면엔 햇빛이 들어오지 않으니 유리화를 만들지 못하고 모자이크 그림을 시도했다.

그림을 보면, 이 작가가 한국적인 종교미술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에게 하늘빛 저고리·쪽빛 치마 등 한복을 입혔고, 아기 예수도 알록달록한 색동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렸다. 황금빛 배경에 청(靑), 적(赤), 황(黃) 등 원색을 과감히 써서 생동감을 부여했다. 얼핏 보면 촌스럽게 느껴지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정겹다. 무심한 듯 정면을 응시하는 마리아와 예수의 모습에서는 기품이 배어 나온다.

그림 하단에 한글로 적은 ‘평화의 모후여 하례하나이다’라는 글귀는 성모에 대한 이 작가의 지극한 경배를 드러낸다. 마리아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천사의 고지에 순종하고, 아기 예수를 사랑으로 키웠다. 그 사랑은 정혼자였던 요셉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유대 율법과 풍습에 따르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요셉은 결혼을 앞둔 약혼녀의 배가 예기치 않게 불러왔을 때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그런데 그는 낡은 율법에 따르지 않고 조용히 약혼을 취소하는 방법을 택하려 한다. 그때 꿈속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음을 알렸고 요셉이 순종했다는 게 성경(마태오복음)의 기록이다. 이 화백 그림 속에서 마리아와 예수의 눈길이 평안한 것은, 요셉이 파괴와 죽임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길을 택한 ‘의로운 사람’이었던 덕분일 것이다.

△ 예술 유산을 잇는 사람들

이스라엘에서 귀국한 후 명동대성당 성미술 실을 찾아 정 신부를 만났다. 이 작가의 예술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성미술 권위자인 정 신부는 “이 작가는 서울 약현성당에서 시작해 전국 50여 개 성당의 유리화 작업을 하며 우리나라 교회미술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정 신부는 명동대성당에도 이 화백의 유리화가 있다며 본당의 중앙문 쪽으로 데리고 갔다. 성탄 등 대축일 때 교구장과 사제들이 출입하는 이 문의 위쪽 창문에 유리화가 있었다.

“보시다시피, 유리화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햇빛에 따라 색과 모양이 달라집니다. 작가는 공예, 회화와 함께 과학 지식도 갖춰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는 다방면에 능통한 예술가였지요. 아쉽게도 이 작가는 그 재능을 다 펴지 못한 채 병고로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작업의 명맥이 끊길 것을 염려해 제가 유족에게 권해서 유리화 공방을 만들었지요.”

지난 2002년 설립된 이남규루가유리화공방(Luke glass)이 그것이다. 루가는 이 작가의 세례명이다.

정 신부와 함께 서울 성북동에 있는 루가공방에 가보니, 남녀 10여 명이 커다란 작업대 위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아카데미 과정인 ‘루크 글래스 스쿨’에서 유리화를 배우는 교육생들이라고 했다. 이 작가의 사위인 박정석 작가가 아카데미를 이끌고 있다. 박 작가는 장인이 공부한 바 있는 오스트리아 슐리어바흐 공방에 가서 유리화를 배우고 왔다. 그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주말 교육 과정에 50여 명이 수강한다”며 “유리화가 종교시설뿐만 아니라 일상의 집을 꾸미는 작품으로까지 퍼져가고 있다”고 했다.

이 작가 딸인 그의 아내 이윤주 씨는 배화여대 전통의상과 교수직을 명예퇴직한 후 루가 공방 위층에서 직물 디자인 등을 하는 생활 공방을 꾸리며 소장을 맡고 있다. 공방 이름인 ‘달드베르(Dalle de verre)’는 프랑스어로 유리 덩어리라는 뜻으로,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예술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남편과 제가 각기 전공을 살려서 작업하며 같은 주제로 협업 전시도 합니다.”

부부는 내년 봄엔 경기 파주 헤이리마을에 이 작가를 기리는 미술관을 연다고 했다. 성북동에서처럼 작업실을 갖추고 아카데미를 열어서 유리화를 더 널리 전할 계획이다. 이 소장은 “의사인 남동생도 아버지의 예술 맥을 계승하자는 뜻에 동참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자랑했다. 박 작가는 “유리화는 좋은 유리가 기본인데, 우리나라에 그걸 공급해줄 공장이 없어서 독일에서 수입해온다”며 “어려운 점이 많지만, 우리 전통의 오방색에 가까운 빛을 만들어냈던 이 작가님의 맥을 이어서 더 발전시키기 위해 애쓸 것”이라고 했다.

‘장면 총리 아들’ 장익 주교, 이 작가 오스트리아 유학 길 터줘

■ 이 작가 생애 흥미로운 인연들

또다른 유학생이던 최영심 수녀

현지 유리 장인과 사랑에 빠져

수녀원 탈퇴하고 결혼하기도

이남규 작가의 생애를 살피다가 흥미로운 이름을 발견했다. 장익(1933∼2020) 주교. 제2공화국 총리였던 장면 박사의 아들인 그는 천주교 춘천교구장 등을 지내며 교계에 헌신했다. 자신에겐 엄격하고 타인에겐 너그러운 인품으로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지난 1984년 방한 당시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우리말을 알려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이 작가에게 오스트리아 슐리어바흐 공방을 소개했다는 것이 이런저런 기록에 남아 있다. 장 주교는 1960년대 서울 대방동성당 보좌 신부로 있을 때, 그곳 주임 오기선 신부를 자주 찾아왔던 이 작가를 만나 교우했다. 그 인연으로 자신이 오스트리아 유학 시절에 수차례 가봤던 슐리어바흐 공방에 이 작가가 갈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것이다. 이 공방은 1884년 생겨난 이래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유리화 제작소로 자리해왔다. 이 작가가 여기서 빛의 예술인 유리화를 배워 귀국 후 전국의 50여 개 성당에 작품을 봉헌했으니 한국에도 중요한 곳이다.

이 작가에게 대방동성당의 오 신부를 소개해 천주교에 입교하도록 이끈 사람이 장발(1901∼2001) 당시 서울대 미대 학장이었다는 것도 눈길을 끈다. 장 학장은 장면 박사의 동생이니 장 주교에게 작은아버지가 된다.

장 주교는 이 작가 이후로 유리화에서 두각을 나타낸 최영심(76) 작가의 슐리어바흐 공방 유학도 주선했다. 수녀였던 최 작가는 로마미술대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귀국했다가 장 주교의 안내로 1980년 슐리어바흐에 가서 유리화를 배웠다. 거기서 유리 장인 루카스 훔멜브룬너 수사와 사랑에 빠져 수녀원을 탈퇴하고 결혼했다. 최 작가보다 13세 위인 루카스 장인은 이 작가가 슐리어바흐에서 공부할 때도 동료로서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최 작가는 루카스 장인의 도움을 받아 유리화에 정진했고, 간결하면서도 서정성이 풍부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동양 정서가 가득 담긴 그의 유리화는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성당과 수녀원에 다수 봉헌돼 있다. 우리나라 전역의 40여 개 성당과 수도원에도 최 작가의 유리화가 있다. 그로써 헤아려보면, 한국 성당들의 유리화 빛엔 작가들을 후원한 장 주교의 성심(誠心)이 어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 Tip - 명동성당 성체대회기념 유리화

1989년 한국에서 최초로 열린 세계성체대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유리화. 이남규 작가의 말년 작품이다. 명동대성당 본당 입구의 문 세 개 가운데 중앙문 위의 아치형 창문에 새겨져 있다. 중앙의 하얀 십자가에 둥근 성체가 묘사돼 있다. 십자가 둘레에 그려진 세 마리 비둘기는 성부, 성자, 성령을 상징한다. 바깥 부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상징하는 포도송이와 밀이삭을 그려놨다. 우리 전통의 오방색을 주로 써서 단순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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