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요? 그 시절에는 다들 그랬어요”

김종수 2022. 12. 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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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의 농구人터뷰(66)] '여왕 거미' 한현

 

“코트 안팎에서 정말 고생 많이 한 친구에요. 호리호리한 몸으로 홀로 골 밑을 지키며 상대 팀의 체격 탄탄한 빅맨들 상대로 몸싸움하고…, 순둥순둥한 성격으로 인해 동료들에게 인기도 좋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손해본 부분도 적지 않았죠. 꾀부릴 줄 몰랐고 그저 시키면 시키는데로 팀을 위해 헌신한 모범생이라고 할 수 있었죠. 그런 성실성을 바탕으로 국민은행 전성기의 한축을 담당했고 국가대표까지 뽑힐 수 있었습니다”


농구대잔치 시절 ‘큰 까치’ 조문주의 뒤를 이어 국민은행 센터 계보를 이어갔던 기둥 까치이자 동생 한현선과 함께 자매농구 선수로 유명했던 한현(韓現‧51‧186㎝)에 대한 선수 시절 동료의 평가다. 외견상 그녀는 강해보이는 이미지는 아니다. 순해 보이는 얼굴에 호리호리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배인 조문주 또한 비슷한 체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신 이른바 깡다구 하나만큼은 당시에도 최고로 인정받았던 이른바 파이터였다. 거기에 비하면 한현은 그 정도의 카리스마는 뿜어내지못했다.


하지만 경기에 들어가면 달랐다. 순한 인상으로 할 것은 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국민은행은 ‘여전사들의 소굴’로 불릴 만큼 투지가 남달랐던 팀이었다. 그런 팀에서 센터 포지션을 맡아 골밑을 담당하는 선수가 약할 리가 없었다. 당시 팀의 수장 김태환 감독 역시 지는 것은 못 견디는 성미였던지라 그가 선택한 센터라면 분명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한현은 특히 수비 쪽에서 높은 공헌도가 돋보였다. 좋은 점프력에 더해 왕성한 활동력을 자랑했으며 리바운드, 스틸, 블록슛 등에서도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리바운드를 비롯 수비 관련 타이틀도 여러차례 가져갔다. 좋은 수비 센스를 바탕으로 굿디펜스도 적지 않게 만들어냈다. 빼어난 기량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동기인 당대 최고 센터 정은순에 가린 부분도 적지 않지만 리바운드를 비롯한 수비적인 측면에서는 더 낫다는 평가도 적지 않았다.


선수 시절 그녀의 별명은 ‘여왕 거미’였다. 거미라는 표현을 여성에게 쓰는 것은 별로 반가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대상이 농구 선수라면 또 다르다. 발이 여러개 달린 거미처럼 상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농구를 잘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한현은 긴 윙스팬과 유연한 몸놀림을 앞세워 국민은행 골밑을 철벽 방어했다.


장신자가 적은 팀이었던지라 홀로 포스트를 사수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꾸준하고 묵묵하게 까치 군단의 최종수비를 맡았다. 스포트라이트는 최고의 가드 콤비로 명성을 날리던 박현숙, 이강희에게 쏟아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공헌도에서는 그에 못지않았다.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실속있는 플레이로 수비형 빅맨의 정석을 보여준 한현을 만나 그 시절 농구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프로무대에 대한 욕심요? 당시에는 농구에 대한 미련 자체가 없었습니다”

Q.어떻게 지내시나요?

선수로 은퇴한 이후 2008년까지 국민은행에서 은행원으로 일하다가 현재는 WKBL에서 경기부 기록원으로 일하고있어요. 학교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치는 방과후 수업도 겸하고있고요. 국민은행에서 함께뛰었던 강희언니와 현숙언니도 기록원으로 일하고있어요. 강희언니는 KBL, 현숙언니는 저랑같은 WKBL입니다. 어찌보면 참 다행스럽기도해요. 은행에 계속있었으면 모를까 지금 제나이에 다른일을 하기에는 정말 막막하고 힘들 것 아니겠어요. 괜찮은 일들은 하고자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하고있어도 나이 때문에 밀릴수도 있을수도 있고요. 그런점에서 농구관련일을 직업으로 할수있다는 자체가 고맙기그지없죠. 그래도 전문직이라면 전문직이잖아요. 한때는 농구공을 쳐다도 보기싫었던 시절도 있지만 지금은 그래도 제가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하고있다는 자체로 너무 좋습니다.

Q.금융권 팀의 최대 메리트가 은퇴 후 은행원으로 일할 수 있다는 부분이었잖아요. 2008년까지라면 꽤 오래 다녔는데, 만약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었다면 직급도 꽤 올라갔을 듯 싶어요. 아쉽지 않으세요?
제 손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딱히 뒤돌아보거나 곱씹고 그런 스타일은 아닌지라 개인적으로는 별반 아쉬운 감정은 없어요.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무난하게 다니기는 했으나 적성적인 부분에서 완전 잘 맞았던 것도 아니었고요. 간혹 금융권 팀을 다니다가 은퇴했는데 은행원의 길을 가지 않고 어디 코치 등으로 갔다가 잘 풀리지 않은 분들이 계세요. 나름 안정된 직장을 포기했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볼 수 있죠. 그런 경우 ‘그냥 은퇴 후 은행원에 집중했다면 지금쯤 OO직책 정도는 달고 있을텐데…’하고 아쉬운 마음을 가지기도 한다고 하더라고요. 비슷한 시기에 일을 함께했던 이가 높은 직책에 있을 경우 더 그런 마음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거기에는 안해본 혹은 충분히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 탓도 클 듯 싶어요. 은행이라는 곳도 경쟁이 엄청나요. 단순히 오래 버틴다고 막 승진이 되고 그런 것은 아니죠. 물론 자리에 맞는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마냥 버티고 있을 수도 없겠지만요. 저는 그곳에서 선수 시절과는 또 다른 경쟁을 경험했어요. 은행원이라는 직업이 장점도 많지만 이면에는 실적압박 등 어려운 부분도 존재합니다. 저같은 경우 상당한 부담으로 다가오더라고요.

Q.실업 시절에서 커리어를 끝냈어요. 프로에서 조금만 뛰셨어도 이름을 더 알리셨을텐데요.
지금에 와서는 ‘그랬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살짝 들지만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당시에는 일절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워낙 힘들게 농구를 해서인지 아쉬움같은게 전혀 남지 않았거든요. 저에게 농구는 즐긴다는 의미보다 ‘힘들다’라는 느낌이 강했어요. 불태울 때까지 불태웠던지라 미련 없이 돌아설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은퇴하고 나서 한참 동안은 농구 쪽은 쳐다보고 싶지도 않더라고요. 국민은행에서 직원으로 근무하면서도 농구공을 다시 잡고 싶다 그런 생각은 안들었습니다. 물론 프로같은 경우 실업 시절과는 비교도 안되게 큰돈이 오가긴 하죠. 저희 때야 월급제인지라 다들 비슷한 수준으로 돈을 받아가고 어쩌다 좋은 성적거두면 보너스 정도가 고작이었어요. 선발과 벤치의 차이가 크지 않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공헌도에 따라서 가져가는 금액의 차이가 장난 아니죠. 예전에는 농구로 큰돈을 번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가능해졌잖아요. 가끔 예전 동료들 만나서 ‘우리가 만약에 10년만 늦게태어났으면…’이라는 말은 우스갯소리로 주고 받지만 어차피 바꿀 수 없는 사항이고 그저 여자농구 인기가 좋았던 농구대잔치 시절에 실컷 뛰고 우승도 한 것으로 만족하고 있어요.

Q.실업 시절 여자선수들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게 너무 없어요. 심지어 현역 시절 잠깐 뛰던 영상같은 것도 찾아보기 쉽지 않더라고요. 선수 한현은 어떤 플레이를 했나요?
여자농구의 인기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시절이 시절인지라 어지간히 유명한 스타급 빼고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 스타들마저도 아주 약간이 남아있을 뿐이고요. 지금이야 인터넷, 영상매체가 워낙 발전해서 ‘저런 것까지 기록이 되어있네’ 할 정도로 세부기록이 남겨지고 있지만요. 그런 점은 좀 부러운 것 같아요. 저같은 경우 당시 상당수 센터들이 그렇듯 공격보다는 수비를 우선시하고 플레이하는 유형이었어요. 공격이야 (박)현숙 언니, (이)강희 언니 등 팀 내에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으니 받아먹기나 미들슛 정도 외에 일부러 전면에 나서고 그러는 상황은 많지 않았죠. 포스트 수비 위주로 플레이하다 보니 리바운드를 많이 잡았고요. 상대가 달려들면 블록슛도 하고 그랬었죠. 수비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서 리바운드 타이틀은 자주 받았던 기억이 나요. 블록슛 1위도 여러번 했고요. 저같은 경우 데뷔부터 은퇴까지 김태환 선생님 한분하고만 했거든요. 선생님께서 다른 것은 몰라도 그런 기록 같은 것은 잘 챙겨주셨어요. 저희들이야 그런 것 일일이 체크하고 그러기는 어려웠는데 그런 부분은 참 고마웠죠. 아쉽게도 수상기록에 크게 신경을 안쓰다 보니 무엇을 몇 번 했는지 정확히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라떼는~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도 있는 듯 싶어요”


Q.그 시절 국민은행은 정말 엄격한 팀으로 유명했어요. 일단 김태환 감독은 맹장으로 통했잖아요.

엄하시기는하셨죠. 하지만 그 시절에는 다들 그랬지 않나 싶어요. 지금과 비교해서 전체적으로 체벌, 폭언 등이 묵인되고 있었고 성적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니까요. 더욱이 저희 같은 금융권 팀은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팀들과 비교해 지원이 적다보니 선수층이나 시스템적인 부분 등에서 부족했죠. 그런 상황에서 성적을 내야 하는지라 훈련량도 좀 더 많았고 어쩔 수 없이 엄격했던 부분도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팀을 잘 만들어 놓으셔서 매시즌 우승권에서 경쟁하고 그랬습니다.

Q.그때 얘기를 들어보면 폭언, 폭행도 문제지만 아파도 뛰게 하는 것은 좀 아닌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그때는 다들 그랬어요. 지금처럼 의료나 재활시스템이 좋지 않아서 부상으로 고생하는 선수들이 참 많았죠. 그러다보니 정상적인 몸 상태를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었어요.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당연한 듯 달고 살았죠.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다 빠진다면 선생님 입장에서도 코트에 내보낼 선수가 얼마나 있었을까 싶어요. 흔히들 ‘라떼는…’그러잖아요. 진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냥 다들 아파도 참고 뛰었어요. 그 시절에는 그게 당연한 것이었고 그렇게 해야만 했었죠. 아마 당시에 뛰었던 상당수 선수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요.

Q.지금의 시각으로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시절 나름대로의 고충도 있었다는 말이군요?
그렇죠. 어디까지나 저는 코트에서 뛰는 선수였지 사령탑 입장이 안 되어봐서 리얼하게는 말씀을 못 드릴 것 같지만 고충이 많았을거에요. 때리고 싶어서 때리고 욕하고 싶어서 욕하고 싶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선수들 또한 몸 상태가 좋은 상태로 코트에 내보내야지 부상도 제대로 낫지 않은 상태에서는 제 기량을 발휘하기 어렵잖아요. 그렇게 하셨으면서도 이래저래 마음이 아프셨을거에요. 어떤 면에서는 선생님이 안타깝기도 해요. 농구의 맥을 짚고 맞춤형 설명을 해주시는 등 가르치는 능력은 정말 최고거든요. 하지만 최근들어 불거지고있는 폭력, 폭행, 부상선수 관리 등에서 안좋은 얘기가 오가면서 좋은 점까지 덮이고 있지 않나 싶어요. 지도자로서의 능력은 당시는 물론 지금 누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않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인이나 보살도 아니고 저라고 왜 서운하거나 아쉽고 그런 부분이 없었겠어요.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야 보이고 느껴지는 부분도 분명있더라고요.
 


Q.대화를 하다보니 성격이 무척 긍정적이고 유순한 것 같아요.
긍정적이라…, 꼭 그렇지도 않아요. 지나간 일에 대해서 자꾸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차피 엎질러진 물은 담을 수 없는 것을 알기에 그러는 면도 있고요. 저도 안 좋은 일 생기거나 그러면 자꾸 신경 쓰이고 생각나고 그래요. 성격도 유순까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운동할 때는 반항? 그런 것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성향이기는 했어요. 그래서 더 선생님에게 타켓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리 당시 분위기가 엄했다고 해도 학생도 아니고 성인들이잖아요. 다들 시키면 시키는데로 따르는 분위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심하다 싶으면 자잘한 반항들은 있었죠. 간혹 ‘너무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선수도 있었고, 화가 나서 얼굴이 굳는다던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돌아서는 등 싫다는 표현이 동반되기도 했죠. 저는 그런 것을 일절 할줄 몰랐어요. 그냥 시키시는 것은 최선을 다해 다하려 했고, 뭐라고 하거나 손찌검이 있으셔도 네, 네하고 대답만 했죠.

 

Q.이해가 안됩니다. 그런 선수는 혼낼 필요가 전혀 없을 듯 싶은데요. 시키는데로 충실히 따르잖아요.

저 역시 지금까지도 그런 부분은 이해가 안가요.(웃음) 왜 그렇게까지 하셨는지…, 전 그저 선생님이 시키는데로 뭐든지 최선을 다해서 이행하려고 노력했거든요. 반항 같은 것은 당시에 생각도 못했어요. 물론 제 능력이 선생님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부분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것은 제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잖아요.

Q.농구가 힘들었다는 말에는 그런 요소들도 영향을 끼쳤겠군요?
그게 다는 아니지만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하겠죠. 그냥 아무 생각없이 최선을 다해 선생님 말씀 따르고 팀을 위해 뛰려고 했던 시절이지만, 농구를 한다는게 썩 즐겁지는 않았으니까요. 즐거웠다면 은퇴 후 농구 쪽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그랬겠죠.

Q.당시 선수들 중에는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해 부상을 달고 사는 경우가 태반이더라고요.
저 역시 부상은 꽤 있었어요. 무릎도 그렇고 원인 모를 목 근육 경화로 아예 제대로 움직이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적도 있었으니까요. 특히 많이 달리고 점프하는 특성상 무릎 통증으로도 고생을 좀 했죠. 다행히 수술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어요. 첫 번째 크게 다쳤을 때가 기억나요. 병원에 갔더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선생님도 수술을 안했으면 하는 눈치셨고 저 역시 수술까지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충실히 재활을 했더니 다시 뛸 상태가 되고 그러더라고요. 지금처럼 디테일한 관리가 되던 시절이 아니잖아요. 그냥 어지간히 아파도 참고 뛰는 거에요. 선배 언니들도 그랬고 그 언니들의 언니들도 그랬을테니까요. 오늘 자주하게 될 말 중 하나 같지만 그때는 그랬어요. 수술 안하고 재활 택했다고 저만 특별했던게 아니라는 말이죠. 주변에서 지금까지도 고생하시는 분들을 적지 않게 봤어요. 그 시절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무리하고 그런 것에 대한 후유증이죠. 저 역시 부상으로 고생은 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참고 뛰면 힘들기는 했죠. 그러나 관절 물 빼고 대포 주사 맞고 그런 정도까지 가지는 않았어요. 은퇴 후에도 생활하는데 별 지장이 없었고요. 어떤 후배는 ‘언니는 은퇴 후 몸을 너무 아껴서 안 아픈 것일 수도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맞는 부분도 있는 듯 싶어요. 운동하던 사람들은 은퇴 후에도 몸이 근질거려서 못 참거든요. 대학을 진학해서 거기서 농구를 계속하던지 아님 동호회 농구에서라도 뛰던가 그것도 아니면 본인들끼리 모임을 만들어서 하기도 해요. 하지만 저는 은퇴 당시 농구가 너무 싫었던지라 아예 쳐다도 안 본 케이스잖아요. 아주 제대로 쉬었죠.(웃음) 관절은 별것 없거든요. 안 좋다 싶으면 쉴 때 쉬어주는 것, 그거죠.

Q.쳐다보기도 싫었을 정도라니, 정말 농구를 힘들게한 듯 싶네요. 어떤 부분이 가장 힘들었을까요?
그냥 하나만 말하기 어려울 만큼 복합적이었던 것 같아요. 만약 한 두개가 원인이었을 경우 그것만 해결된다면 속이 뻥 뚫린 듯 문제해결이 되었겠죠. 끝나지 않는 선생님의 폭언과 손찌검도 힘들었고 훈련도 힘들었고 경기도 힘들었고 다 힘들었던 시절이지 않았나 싶어요. 특히 저같은 경우 포지션이 센터였잖아요. 지금은 토탈농구 개념으로 전 포지션에 걸쳐 몸싸움이 펼쳐지고 다양한 도움 수비 전술도 발전하고 그런 상태잖아요. 당시에는 그냥 원초적인 클래식 농구였어요. 특히 골밑에 한정해서는 더욱 그랬죠. 골밑에서 궂은일은 온전히 빅맨, 특히 센터가 거의 다해야 했습니다. 사실 체형만 보면 제가 센터에 맞는 사람이었는지도 잘 모르겠어요. 키는 좀 됐지만 골격이 얇고 그래서 체격이 좋은 상대팀 센터와 붙으면 정말 힘들었거든요. 제 약점을 알고 몸싸움을 걸어오는 선수도 적지 않았습니다.

 

 

Q.순간 머릿속으로 그림이 떠올랐어요. 많이 힘들었을 듯 싶네요.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부딪혔어요. 승부에서 변명은 필요없거든요. 사이즈의 차이를 떠나 저는 한팀의 골밑을 사수해야 되는 센터잖아요. 격투기처럼 체급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 역할을 맡았으면 악으로 깡으로 부딪혀야 되는 거죠. 한 예로 (정)은순이와 비교해도 바로 보일 것 같아요. 은순이가 종합적인 기량에서 저보다 뛰어났지만 일단 몸만 봐도 꽤 차이가 나요. 은순이는 포스트업을 잘 치는데 거기에는 기술적으로 뛰어난 부분도 있겠으나 누구와 붙어도 쉽게 밀리지 않을 탄탄한 몸에서 나오는 파워의 영향력도 크거든요. 그래서인지 외부에서도 ‘국민은행 선수들 중에서도 저기 센터가 가장 고생이 많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는 했죠. 쓱 보기에도 말라 보이는 얘가 체격 좋은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고생하는게 안쓰러워 보였나 봐요.(웃음)

“동생과 저, 둘 중에 누가 더 유명했냐고요?

Q.박찬숙-박찬미, 조상현-조동현, 이규섭-이흥섭, 박언주 박혜진, 여준석-여준형, 김진모 김동현 등 간혹가다 자매 혹은 형제 선수가 등장하면 화제가 되기도 해요. 더불어 저런 경우 상당수는 형제 중 한명이 특출나게 앞서나가는 경우가 태반이더라고요. 본인 같은 경우 동생인 한현선과 누가 더 유명했나요?

하핫…, 이것 상당히 어려운 질문인데요. 둘 다 나란히 국가대표도 하는 등 나름 잘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당시를 대표하던 스타까지는 아니었고, 특출나게 어느 누가 팍 치고 나가지는 않았던 듯 싶어요. 일단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자면 삼성에서 뛰었던 동생 (한)현선이는 농구선수라는 가장 큰 부분만 같을 뿐 여러 가지 면에서 접점이 많지 않아요. 동생이 신장은 저와 비교해 꽤 차이가 났어요. 176㎝인가 됐을거에요. 그래도 투지와 센스가 워낙 탁월한지라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팀 사정상 센터까지 보고는 했죠. 농구에 입문하던 시절에는 가드였고 이후 실업 무대에서 포워드로 활약한 것을 보면 정말 다재다능했네요. 고등학교도 서로 달랐어요. 저는 숭의여고를 다녔던 반면 현선이는 선일여고를 택했죠. 그래서인지 1989년도 당시가 지금도 생생해요. 당시 동생이 1학년이고 제가 졸업반이었는데 여러차례 코트에서 진검승부가 펼쳐졌거든요. 나이가 두 살 차이인지라 딱 그해가 아니면 학창시절 맞대결할 기회는 더 이상 없었던거죠. 그래서인지 언론에서도 유독 저희 자매의 대결에 여러 가지 스토리나 살을 붙여가면서 관심을 보여주는 모습이더라고요.

Q.말씀대로 스토리가 되니까 관심이 많이 쏠린 듯 싶어요. 맞대결에서 누가 많이 이겼나요?
사실 농구는 팀 스포츠인지라 개인끼리 맞대결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약간의 흥미 요소는 되겠지만요. 개인의 활약 또한 팀을 승리로 이기기 위한 과정 중 하나니까요. 아무리 개인 성적이 좋아도 팀이 패하게 되면 의미가 없는거죠. 아쉽게도 동생이 있던 팀하고 붙으면 매번 패했던 기억만 나네요. 중학교 때도 그렇고 89년 있었던 춘계연맹전, 서울시대회, 쌍룡기 등에서도 줄줄이 고배를 마셨죠. 개인간 맞대결은 팽팽했어요. 기록도 비슷했고요. 하지만 팀간 대결에서 계속 패했던지라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현선이는 볼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승부 근성이 대단했어요.

Q.보통 형제 자매가 운동을 하게 되면 동생은 형 언니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그렇지도 않았던 듯 싶어요.
맞아요. 어쩌면 제가 농구를 먼저 시작하고 동생이 그걸 보면서 시작했더라면 그랬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희는 비슷한 시기에 농구를 하게 된 케이스라요. 정확히 말하면 두 살 터울 동생이 살짝 먼저 시작했어요. 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저는 6학년 말에 농구공을 잡았어요. 저같은 경우 초등학교가 끝나가는 시점이라 전학도 안되고 제대로 한 것은 중학교 1학년부터라고 하는게 맞겠네요. 어찌보면 그냥 서로 각자의 길을 간거죠. 영향을 끼칠 시간 자체가 없었습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저는 그냥 단순해요. 초등학교 시절 키가 큰 편이었던지라 주변에서 ‘너는 운동을 해야 된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저는 딱히 그러고 싶지않았어요. 운동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제의가 들어왔고 어느 순간 농구공을 잡게되더라고요. 사실 주변에서 권하는 운동 중에 농구나 배구가 많았거든요. 개인적으로는 그나마 농구가 배구보다는 더 끌렸어요. 농구도 막 간절하게 하고 싶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만약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농구를 해야지라는 생각은 막연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쨌거나 처음 농구부에 들어가서는 깜짝 놀랐어요. 저는 제가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학생들 사이에서 큰 것이더라고요. 체육관에는 저 못지않게 큰 선수들이 많았어요. 어떻게보면 저는 고집 그런게 적은가 봐요. 그냥 주변에 순응하면서 살았던 듯 싶어요. 국민은행을 가게된 것도 개인적으로 별다른 생각은 없었어요. 부모님이 골라주신거죠. 

 

Q.처음부터 빅맨 포지션에서 뛰었나요?
주로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 농구부에 들어갈 때만 해도 비슷한 신장의 친구들이 꽤 있었어요. 하지만 저는 중학교 때 쭉쭉 큰 반면 그대로 정체되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러다 보니 저는 계속 골밑을 맡게 되더라고요. 저는 성향상 운동을 썩 좋아하지 않아서 운동신경같은게 별로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남들이 볼 때 ‘우와! 운동신경 정말 좋다’ 그런 정도는 아니더라도 순발력? 그런 부분은 좋았던 듯 싶어요. 그러니까 두텁지 않은 체형에도 불구하고 리바운드, 블록슛 등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름뿐인 국가대표라도 빠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점은 아쉽습니다“

Q.국가대표로는 두각을 못나타내셨어요.

아무래도 그랬죠. 동 포지션에 역대급 센터로 평가되는 (정)은순이가 있었으니까요. 솔직히 제가 아니라고 해도 전성기 시절 은순이를 밀어낼 선수가 얼마나 있었을까 싶어요. 그만큼 대단한 선수였잖아요. 사실 팀에서는 제가 국가대표로 뽑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은순이에게 밀려서 후보일 것이 뻔하니까요. 당시 국민은행의 힘은 엄청난 훈련량이었어요. 그런데 국가대표로 가서 제대로 경기도 못 뛰고 오면 훈련량이 채워지지 않았겠죠. 그럼 한동안은 몸이 굳고 컨디션이 잘 안 올라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팀에서도 저의 차출을 여러번 거절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도 많이 뛰지도 못하는데 나가서 앉아만 있다 오는 것이 달갑지는 않았고요. 무엇보다 모든 신경과 관심이 국민은행이라는 소속팀에 맞춰져 있던지라 팀에 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Q.그런 선택이 무조건 좋다고만은 볼 수 없을 듯 싶어요.
맞습니다. 백업 멤버를 데리고가는 것은 주전들의 체력안배 및 부상자가 발생할 경우를 대비한 보험의 성격도 있잖아요. 아무리 주전 위주로 경기가 돌아간다 해도 백업 역시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는 것인데 제가 생각이 짧았던 듯 싶어요. 더욱이 국가대표가 달리 국가대표에요. 나라를 대표해서 다른 나라 대표팀과 경기를 가지는 것이잖아요. 만약 누군가 선배 언니라도 ‘일차원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참가에 의의를 두더라도 되도록 태극마크는 거절하면 안된다. 국가를 위한다 등 구태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도 커리어 등 얻는 것이 많다’는 말을 해줬더라면 일찍 깨닫고 적극적으로 동행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Q.국가대표를 빠짐으로 해서 후회했던 순간도 있었을 것 같아요.
있었죠. 19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이었던가 그랬을거에요. 당시 (박)현숙언니, (이)강희언니랑 저까지 해서 국가대표 명단에 들어갔어요. 합류는 했지만 저같은 경우는 역시나 (정)은순이가 있어서 별반 기대는 안들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백업 멤버로라도 국가대표를 하는게 뭐가 그리 아쉬웠을까 싶거든요. 국가대표의 상징성이나 무게감을 생각하면 무조건 해야 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시에는 팀이 먼저인 상황이었고 개인적으로도 반갑지만은 않았던 시절이었죠. 나이가 어리던 시절에는 벤치만 달구는게 별로 어색하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선후배 관계가 확실하던 시절인지라 언니들이 주전으로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거든요. 실제로 언니들이 잘하기도 했지만 ‘난 동생이니까’하고 위안도 삼을 수 있었고요.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차서는 실력으로 밀렸다는게 보이는 상황이었으니까 기분이 좀 달랐습니다. 그러다가 강희 언니랑 같이 국가대표팀을 나가게 됐죠.

Q.잉? 국가대표로 합류한 상황에서 중간에 나갈 수 있나요?
솔직히 어떻게 빠지게됐나 기억이 잘 안나요. 그냥 나갔던 것 밖에는요. 당시 현숙 언니는 주전으로 뛰었는데 저랑 강희 언니는 벤치 멤버였어요. 강희 언니는 실력은 좋았지만 멤버구성상 여러 가지 이유로 선발로 활용되지 않았던 듯 싶어요. 당시 김태환 선생님이 대표팀 코치였어요. 마음같아서는 제자들을 쓰고 싶었겠으나 코치에게는 그런 권한이 없잖아요. 그래서인지 주전으로 뛰지 않는 저와 강희 언니는 나갔으면 하는 눈치시더라고요. 그래서 나가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대표팀이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버렸어요. 명예는 물론 연금까지 나오는 상황이 만들어진 거죠. 이래저래 너무 아쉬운 대회로 기억되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한현을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심히 뛰고 또 뛰던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팬들의 함성이 들릴 때였습니다. 여러모로 많이 부족했지만 항상 큰 목소리로 응원해주셔서 힘을 주신 덕분에 힘든 순간에도 기운을 냈던 기억이 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시절이었지만 인터뷰를 통해 다시 회상해보니 이래저래 감회가 새롭습니다. 올 겨울은 유달리 눈이 많이 내리는 듯 싶어요. 길이 미끄럽습니다. 다들 운전조심, 보행조심 당부드려요. 따뜻하고 안전한 겨울되세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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