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빨치산 출신 아버지가 꺾어온 붉은 맹감 열매

김민철 논설위원 2022. 12. 20.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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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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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아버지의 영정은 흰 국화에 둘러싸였다. 살아생전 꽃 따위 쳐다보지도 않았던 아버지였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가을 녘 아버지 지게에는 다래나 으름 말고도 빨갛게 익은 맹감이 서너가지 꽂혀 있곤 했다. 연자주빛 들국화 몇송이가 아버지 겨드랑이 부근에서 수줍게 고개를 까닥인 때도 있었다. 먹지도 못할 맹감이나 들국화를 꺾을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도 그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바위처럼 굳건한 마음 한가닥이 말랑말랑 녹아들어 오래전의 풋사랑 같은 것이 흘러넘쳤을지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아버지 숨이 끊기고 처음으로 핑 눈물이 돌았다.>

정지아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다 오래 눈길이 머문 대목이다. 이 소설은 빨치산 출신 아버지의 장례식을 중심으로 아버지의 생애와 그와 인연을 맺은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는 ‘이념보다 사람 이야기로 쓴 것’이라고 했다. 이념·죽음 등을 다소 유쾌한 톤으로 풀어내서 그런지 술술 읽혔다. 대학 시절 읽은 김학철의 ‘격정시대’를 읽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항일투쟁을 다룬 ‘격정시대’에 대해 당시 ‘혁명적 낙관주의’라는 말을 쓴 것 같다. 다만 정세 판단을 위해 여전히 뉴스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빨치산 출신 부모, 장례식장에 몰려와 고인이 (위장) 자수를 했으니 ‘통일애국장’ 대신 ‘통일애국인사 추모제’라고 쓴 플래카드를 걸라는 전직 빨치산들에 대해 웃어야할지 어떨지 망설여졌다. 빨치산 출신인 어머니는 ‘조용히 가시게 할란다’며 이 제의를 거절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아버지가 지게에 꽂아온 맹감은 청미래덩굴을 가리킨다. 청미래덩굴은 어느 숲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덩굴나무로, 지역에 따라 망개나무, 맹감 또는 명감나무라고 부른다. 꽃보다 가을에 지름 1㎝ 정도 크기로 동그랗고 반들반들하게 익는 빨간 열매가 인상적인 식물이다. 잎 모양은 둥글둥글한 원형에 가깝지만, 끝이 뾰족하고 반질거린다. 덩굴손이 두 갈래로 갈라져 꼬불거리며 자라는 모습이 귀엽다.

청미래덩굴 잎과 열매.

경상도에서는 청미래덩굴을 ‘망개나무’라고 부른다. 그래서 청미래 잎으로 싸서 찐 떡을 망개떡이라 부른다. 떡장수가 밤에 “망개~떡”이라고 외치고 다니는 바로 그 떡이다. 망개떡은 청미래덩굴 잎의 향이 베어들면서 상큼한 맛이 나고, 여름에도 잘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청미래덩굴이 제주 4·3사건을 다룬 현기영 소설 ‘순이삼촌’에도 나오고 있다.

<솥도 져나르고 이불도 가져갔다. 밥을 지을때 연기가 나면 발각될까봐 연기 안 나는 청미래덩굴로 불을 땠다. 청미래덩굴은 비에도 젖지않아 땔감으로는 십상이었다. 잠은 밥짓고 난 잉걸불 위에 굵은 나무때기를 얼기설기 얹어 침상처럼 만들고 그 위에서 잤다.>

공비와 군경을 피해 한라산 굴속으로 피신한 ‘도피자’들이 밥을 지을 때 연기를 내지 않기위해 청미래덩굴을 쓰는 것이다. 불을 지펴도 연기가 나지 않기로 유명한 나무로 싸리나무가 있고, 때죽나무, 붉나무도 연기가 적게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빨치산 정하섭이 찾아왔을 때 소화가 연기가 나지 않도록 싸리나무로 불을 지피는 장면이 나온다.

청미래덩굴 열매.

청미래덩굴과 비슷하게 생긴 식물로 청가시덩굴이 있다. 청가시덩굴도 숲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둘다 가시가 있고, 잎과 꽃도 비슷하다. 둥글게 휘어지는 나란히맥을 가진 것도 같다. 그러나 청미래덩굴 잎은 반질거리며 동그란데 비해 청가시덩굴 잎은 계란형에 가깝고 가장자리가 구불거린다. 열매를 보면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 청미래덩굴은 빨간색, 청가시덩굴은 검은색에 가까운 열매가 달린다.

청가시덩굴 열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아버지 겨드랑이 부근에서 수줍게 고개를 까닥인’ ‘연자주빛 들국화’는 쑥부쟁이일 것이다. 들국화라는 종은 따로 없고 가을에 피는 야생 국화류를 총칭하는 단어다. 들국화라 부르는 꽃 중에서 보라색·흰색 계열은 벌개미취·쑥부쟁이·구절초가 대표적이고, 노란색 계열로 산국과 감국이 있다. 이들 들국화 중에서 연자주빛이라고 했으니 벌개미취와 쑥부쟁이 중 하나다. 그런데 벌개미취는 깊은 산에서 자라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전국에 퍼졌기 때문에 소설 속 아버지가 꺾어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 같다. 작가가 빨간 청미래 열매와 연자주색 쑥부쟁이로 사회주의자 아버지에게도 낭만이 있었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쑥부쟁이는 꽃은 연보라색이고 아래쪽 잎에 비교적 큰 톱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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