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투명성이 기업 자산이다[안치용의 까칠한 ESG 이야기](9)
미국이 사상 최악의 테러 공격인 9·11로 충격과 혼란에 빠진 지 불과 몇달 만인 2001년 12월 초 월가는 엔론 사태에 직면했다. 파산 직전인 2000년엔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 꼽힌, 약 2만명의 직원을 거느린 ‘우량 기업’이었다. 하지만 이 회사가 자산과 이익 등 회계장부를 날조해 투자자와 금융당국 그리고 소비자를 속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실적은 최대로 부풀리고 부채와 손실은 은닉했다. 더 놀라운 건, 엔론의 회계감리를 맡은 유명 회계법인 아서앤더슨이 분식회계에 사실상 엔론과 공모했다는 사실이었다. 1913년 설립돼 엔론 사태 발발 전까지 세계 84개국 385개 지사에서 7만여명이 일하던 아서앤더슨도 이 사태로 문을 닫는다.
다른 나라의 부패나 불투명성을 강도 높게 비판한 미국으로선 엔론 사태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여파로 2002년에 기업의 회계투명성에 초점을 맞춘 ‘사베인즈옥슬리 법(Sarbanes-Oxley Act)’이 제정된다. 회계투명성 개선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투명경영을 핵심 가치로 투명성을 단순히 설명하면 어떤 기업이나 조직의 정보를 일반인이나 다른 조직에서도 입수할 수 있는 상황이다. 투명성을 중심으로 파악한 기업경영을 투명경영이라고 한다. 투명경영은 1997년의 아시아 외환위기와 2001~2002년의 미국 기업의 신뢰성 위기를 거치며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회계를 비롯해 다양한 기업정보를 포괄하게 됐다.
미국 패션브랜드 에버레인은 아예 투명성을 핵심가치로 판매하는 기업이다. 창업자 마이클 프레이스먼은 50달러에 판매되는 티셔츠 한 장의 원가가 7.5달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뭔가 부당하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이 사실을 소비자가 알기 어렵다는 점도 그를 화나게 했다.
에버레인은 프레이스먼의 이러한 의문을 배경으로 2010년 창업됐다. 소비자는 에버레인 홈페이지에서 재료비, 부자재, 인건비, 세금, 운송비 등 상품의 기본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다.
에버레인의 경영철학은 탁월한 품질, 윤리적인 공장, 급진적 투명성이다. 에버레인은 노동환경과 기업 구조, 생태계 보호를 위한 노력 등 다양한 정보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윤리적 공급망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노력은 세계 각지에 있는 에버레인의 공장 이름과 정확한 위치, 직원 수 및 직원들이 현재 하는 일과 노동환경에 관한 정보의 공개로 이어졌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제품당 탄소배출량을 55%까지 감축하고 2050년에는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폐기물과 화학물질,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면서 재활용되지 않은, 즉 처음 생산된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구체적인 감축 계획이 홈페이지에 게시돼 있다. 나아가 매년 그해의 성과를 정리한 환경영향보고서를 발표해 소비자와 공유한다.
환경손익계산서(EP&L) 공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 구찌, 생로랑, 보테가베네타, 발렌시아가를 보유한 프랑스 명품 기업 케링그룹은 환경손익계산서(EP&L)를 공개한다. 프랑수아 앙리 피노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가 2010년 일부 브랜드에 처음 도입한 이래 2015년부터 산하 브랜드 전체에 적용하고 있다. 가죽 원단 등 원자재 90%의 생산·유통 과정을 분석해 탄소배출량과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 즉 환경발자국을 추적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금전적 가치로 환산해 매년 EP&L을 발표한다. 환경에 미친 악영향이 큰 부문에 대해선 새로운 공정을 적용해 개선한다.
케링은 2025년까지 EP&L상 ‘환경 손실’을 2020년 대비 40% 줄인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에 따라 미국 항공우주국(NASA), 스탠퍼드대학 등과 협업해 몽골 내 캐시미어 생산지 일부에서 염소 방목법을 바꿔 목초지를 보호하게 했다. 중국 내 섬유공장에는 새 대기·수질오염 기준치를 설정하고 생산 과정을 바꿨다.
피노 회장은 2019년 말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 ‘패션협정’을 주도했다. ‘패션협정’은 패션 기업이 지속가능경영을 추구하겠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으로, 프랑스 기업 60곳이 참여했다.
ESG 보고의 확산 케링 외에 푸마 등이 EP&L을 작성하지만, 투명성을 보여주는 핵심지표는 ESG 보고(사회 보고)이다. EP&L은 크게 보아 ESG 보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지속가능성 전반을 선도하는 유럽연합(EU)은 ESG 보고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다. 이미 2014년에 유럽 비재무보고지침(NFRD)을 통해 상장법인, 은행, 보험회사, 공기업 중 고용인 500명 이상인 회사의 비재무정보 보고, 즉 ESG 보고를 의무화했고 2018년(2017년 회계연도 보고)부터 적용하고 있다. 적용대상은 종업원 500인 이상인 상장법인·공기업·금융기업(은행·보험사) 중 ‘자산총액 2000만유로 초과’와 ‘순매출 4000만유로 초과’의 두 가지 기준 가운데 하나 또는 모두를 충족한 기업이다. 2018년 기준으로는 EU 전역 약 1만1700개 대기업 등이 적용대상이다.
보고 내용은 환경, 사회 및 노동자, 인권 존중, 반부패 및 뇌물, 이사회 다양성(연령·성별·교육 및 경력) 등이다. ‘원칙 준수 혹은 예외 설명’(CoE·Comply or Explain) 방식을 채택해 정보공개가 원칙이나 비공개 시 이유 설명의 의무가 있다. 또한 연례보고를 기본으로 해 사업보고서와 함께 내거나 따로 내거나를 선택할 수 있다. NFRD는 2021년 4월 ‘기업 지속가능성 보고 지침(CSRD)’으로 발전해 노동자 10인 미만 또는 연매출액 70만유로 이하 소기업을 제외한 상장기업 4만9000개가 보고의무를 지게 됐다. 비(非)EU 법인의 EU 자회사 및 EU에 상장된 비(非)EU 법인도 적용을 받는다. 보고 정보의 검증(혹은 감사) 의무, 추가 보고 요건 도입, 디지털 공시 등 범위 외에 내용도 강화했다.
불과 20년 전에 엔론 사태가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최근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앞으론 투명성이 기업경영의 기본값이 될 전망이다. 공개는 공개할 내용을 필요로 하고, 공개할 내용의 확보는 경영의 본질적 변화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기업이나 당국이 모두 ESG 보고 도입에 미온적인 건 그래서일까. 만일 그렇다면 빨리 태도를 바꾸는 게 좋다. 지금은 변화 없이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안치용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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