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영진위, 블랙리스트 피해 작품에 2차 가해 논란

김은형 2022. 12. 20.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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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작 상영 영화제 소책자에
이창동 감독의 ‘시’ 황당 서술
각본상을 수상한 2010년 칸국제영화제에 참가한 이창동 감독(왼쪽)과 배우 윤정희. 파인하우스 제공

최근 풍자만화 <윤석열차> 수상·전시에 대한 문화체육관광부의 경고, 가수 이랑이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부르기로 한 노래를 바꿀 것을 요구한 행정안전부의 외압 의혹 등으로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영화진흥위원회(영진위)가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블랙리스트 피해 작품을 두고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도리어 2차 가해를 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영진위는 지난 9일부터 18일까지 전국 독립예술영화전용관 20곳에서 블랙리스트 피해 작품 20편을 상영하는 ‘표현의 자유 영화제’를 열었다. 이 영화제는 지난해 12월부터 활동 중인 영진위 소위원회인 ‘블랙리스트 피해회복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위원회’(이하 특위)가 개최한 행사다. 특위에는 박기용 영진위원장을 비롯해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관장 등 영화인, 법조인 등이 참여하고 있다.

<시> 제작자인 이준동 파인하우스필름 대표가 17일 서울 성동구 KU시네마테크에서 열린 표현의자유영화제에서 영화진흥위원회 사무국에 대한 비판 발언을 하고 있다. 김은형 선임기자

상영작 안내 소책자에는 이창동 감독의 <시>의 ‘2009년 마스터영화제작지원 사건’에 대해 “해당 사업의 1차 심사에서 의도적 배제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는 특위의 설명이 적혀 있다. ‘2009년 마스터영화제작지원 사건’은 2009년 영진위가 2편을 선정하기로 했던 마스터영화제작지원사업에서 <시>가 2등 점수를 받고도 선정되지 않았던 사건을 말한다.

영진위는 당시 1등 점수를 받은 임권택 감독의 <상화지>(개봉명 <달빛 길어올리기>)만 선정해 제작비를 지원했다. 당시 한국 영화 대표성이 없다는 이유로 탈락한 <시>는 2010년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특위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가 작성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에서 이창동 감독이 ‘(지속적으로 인적청산되어야 할) 좌파의 문화권력’으로 적시됐던 점, 심사 평가 집계표의 높은 점수 등을 이유로 들어 <시>에 대한 의도적 배제가 이뤄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런데 소책자의 특위 설명 바로 다음에 “영진위는 피해가 의심되는 점은 있다 하더라도 배제되었다는 정황적 근거 외 관련 진술 등 밝혀진 사실이 없어 당장 피해 사실로 단정하기 어렵다”는 특위의 정반대 입장 글이 적혀 있다. 한 작품에 대해 정반대되는 조직 내부의 입장이 나란히 실린 것이다.

영화 <시>의 한 장면. 파인하우스 제공

이에 <시> 쪽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제작자 이준동 파인하우스 대표는 지난 17일 오후 서울 광진구 케이유(KU)시네마테크에서 <시> 상영 전 “(소개 글이 쓰인) 리플릿을 보고 모욕감을 느꼈다. 명백한 2차 가해”라고 입장을 밝혔다. 이 대표는 “영진위의 법적인 위임을 받은 소위(특위)에서 내린 결론을 실무 보조하는 사무국 팀장이 바꿔버렸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꼴”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아무개 팀장의 징계를 공식적으로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어 “영진위 사무국이 (과거) 블랙리스트에 저항하지 못한 점이 아쉬워도 수긍은 했지만 이번 사태를 보면서 영진위가 단순한 실행 부서가 아니라 공동정범이라는 확신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 대표가 실명을 거론한 이아무개 팀장은 영진위 블랙리스트제도개선티에프(TF)팀장으로, 소책자에 특위 결론과 상반되는 문구를 넣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특위 위원들에게 <시>의 마스터영화제작지원 ‘배제’를 ‘탈락’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 전자우편도 보냈다. 이 팀장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영진위로서는 피해 인정을 하면 향후 법정 다툼이나 배상 등에서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다”며 “<시>의 경우 피해자 확정 절차가 아직 없어서 배제됐다고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 이렇게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 영화제’ 소책자.
관련 내용이 적힌 영화제 소책자.

영진위는 2018년 ‘과거사 진상규명 및 쇄신을 위한 특별위원회’(과거사특위)를 만들고도 피해자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바 있다. 이아무개 팀장이 말한 ‘피해자 확정 절차 부족’이 영진위가 마땅히 했어야 하는 피해자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관련 진술 등 밝혀진 사실이 없다고 말하는 ‘유체 이탈 화법’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까닭이다.

특위 공동위원장을 맡은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관장은 “블랙리스트 같은 국가 범죄는 직접적인 증거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정황적 증거로 피해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영진위 사무국은 정황적 증거만으로 피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문제를 호도하고 있다”며 “2차 가해 사건의 경위를 파악해 공개하고 피해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상영관에 온 박기용 영진위원장은 “(영진위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다”며 “비판을 받아들이고 문제가 된 사무국 태도에 대해 위원장으로서 책임지겠다”고 말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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