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성심판’이 아닌, 그냥 ‘심판’의 시대가 왔다”
김유정 심판은 떨리는 마음으로 이번 카타르월드컵을 기다려왔다고 했다. 지난 5월 피파(FIFA)가 발표한 심판 명단 129명에는 여성 6명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스테파니 프라파르(프랑스), 야마시타 요시미(일본), 살리마 무칸상가(르완다) 등 3명이 주심으로 뽑혔고, 여성 부심이 3명이었다.
“프라파르는 유럽에서 이미 많은 남자 경기를 소화한 훌륭한 심판이기에 월드컵에서도 주심으로 경기를 배정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했어요.” 김 심판의 기대는 현실이 됐다. 프라파르는 월드컵 92년 역사상 첫 여성 주심으로 경기장에서 휘슬을 불었다. 지난 2일(현지시각) 카타르 알코르의 알바이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코스타리카와 독일의 월드컵 조별리그 이(E)조 3차전에서였다.
이 경기 부심도 여성이었다. 김 심판은 당시 경기를 떠올리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나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겨레>는 지난 14일 서울 송파구 한 카페에서 국내 여자축구(WK)리그와 국내 남자축구 4부(K4)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김유정 심판을 만났다. 그는 지난 2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 여자 축구 대회인 알가르브컵 주심으로 나서기도 했다.
―어떻게 축구를 시작하게 됐나.
“3살 터울 오빠가 있다. 학교 다니기 전부터 오빠와 함께 놀려고 축구를 했다. 초등학생이 돼서도 방과 후에는 항상 축구 한 게임을 하고 집에 갔다. 축구가 좋아서 했다기보다도 그냥 일상이었던 거다. 체육 시간이 되면 여학생은 피구, 남학생은 축구를 했다. 그런데 방과 후에 항상 축구를 하다 보니, 선생님은 당연하게 나를 축구에 배정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여느 날처럼 남학생들 틈에서 공을 차고 있는데 축구부 코치님이 부르셨다. 그리고는 ‘축구 해볼 생각 없느냐’고 하시더라. 그렇게 시작했다. 당시 축구부 20여 명 가운데 여자는 나 혼자였다.”
―축구선수로서의 생활은 어땠나.
“중3 때 15세 청소년대표팀에 발탁되고. 고1 때 17세 청소년대표팀 발탁됐다. 아시아축구연맹(AFC) 17살 이하 아시아챔피언십 경기에 출전했다. 그 대회 이후 부상을 연달아 겪었다. 고2부터 대학교 2학년 사이 쇄골, 발목, 무릎 등을 다쳤다. 수술만 4번 했다. 부상으로 생긴 공백을 급하게 메우려다 보니까 다른 부상이 또 생기게 된 것 같다. 대학교 2학년 때 축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심판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10년 동안 내 이름이 적힌 유니폼이 나왔고 그걸 입고 운동장을 뛰었다. 선수가 아니더라도 이 일은 계속하고 싶었다. 문득 심판이 보였다. 그렇게 심판 자격을 따고 운동장에 선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선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더블유케이(WK)리그가 기억에 남는다. 국내 여자 축구 최상위 리그다. 축구선수론 가지 못했지만 심판으로 섰던 첫날을 잊을 수 없다. 존경하는 선수들이 내 휘슬에 몸을 움직이고 멈춘다는 게 짜릿했다.”
―남자 경기 심판으로도 뛰고 있는데.
“2018년 국내 남자 심판 체력 테스트를 통과했다. 이후로 매년 체력 테스트를 통과해 자격을 유지해왔다. 지난 5월 케이포(K4)리그에서 주심을 맡을 수 있었다. ‘심판이기 때문에 내가 여기서 뛰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프라파르도 심판이기에 남자 월드컵에서 직접 뛸 수 있었던 거다. 심판이 되면 더 많은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여성 심판으로서 겪는 어려움이 있다면.
“케이포리그에서 선수들이 여성 차별적인 말을 할 때가 있다. 판정하면 ‘여자 심판이라서 잘 모른다’고 면전에서 말하기도 한다. 그런 선수들을 제압하는 것도 기술이다. 몸짓을 강하게 하는 법을 훈련하고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이번 월드컵 전 경기를 봤다. 한국 경기를 빼면, 코스타리카와 독일의 조별리그 이(E)조 3차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지금껏 남자 월드컵에서 여성심판은 관전자였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프라파르가 여성 주심으로 경기장에서 휘슬을 불었다. 월드컵 92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청, 엄청…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남자 월드컵은 티브이(TV)로만 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여자 국제 심판 동료인 프라파르가 그곳에서 직접 뛴 거다. ‘남자 월드컵 심판을 보는 게 내게도 가능한 일일까? 하면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의 목표는.
“남자 국제 심판 체력테스트를 준비하고 있다. 빠르면 이번 달 통과를 목표로 매일 수시간 훈련하고 있다. 훈련이 힘들지만, 이 자격을 따면 스테파니 프라파르처럼 남자 월드컵 심판에 도전할 수 있다. 스테파니 프라파르가 월드컵에서 활약했으니, 남성 스포츠에서도 여성이 충분히 활약할 수 있다고 (대중의) 시각이 바뀔 거라 기대한다. 피파와 아시아축구연맹에서도 여성심판에게 남자 경기에 뛸 것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있다. 이제 ‘여성심판’이 아닌, 그냥 ‘심판’의 시대가 올 거다.”
―축구에 관심 있는 여성들에게 한마디.
“‘골때녀(골 때리는 그녀들·SBS)’ 같은 프로그램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여자 축구 동아리나 클럽팀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그런 관심들이 자연스럽게 심판의 세계로까지 연결됐으면 좋겠다. 아들이 축구를 좋아해서 친해지려고 심판 자격을 딴 여성분도 있었다. 40대가 돼서 심판의 세계로 입문하시는 분도 많고. 선수 출신이 아니더라도 심판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다. 심판에게도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대한축구협회 자료를 보면, 국내 활동 심판(15일 기준) 2759명 가운데 여성은 4.75%인 131명이다. 급수별로 1급 26명(7.1%), 2급 8명(5.33%), 3급 20명(5.65%), 4급 10명(4.18%), 5급 67명(4.06%)이다. 국내 남자 체력테스트를 통과한 여성심판은 7명(2020년)→9명(2021년)→11명(2022년) 순으로 늘고 있다. 올해 케이투(K2·남자축구 2부)리그 1명, 케이포리그 5명 등 여성심판들이 남자 리그에서 활약했다.
<김유정 심판 프로필>
2004년, 15살 이하(U-15) 여자 청소년대표
2005년, 17살 이하(U-17) 여자 청소년대표
2007년, 국가대표 후보 상비군
2010년, 국내 심판 3급 자격
2014년, 국내 심판 2급 자격
2016년, 국내 심판 1급 자격
2016년, WK(국내 여자축구) 리그 주심
2018년, 국제 여성 심판 자격
2019년, 대한축구협회(KFA) 올해의 심판상
2020년, 도쿄 올림픽 여자축구 예선 주심
2021년, K4(국내 남자축구 4부) 리그 주심
2022년 2월, 국제 여자축구대회 알가르브컵(Algarve Cup) 결승 주심 (한국인 최초)
2022년 8월, 국제축구연맹(FIFA) 20살 이하(U-20) 여자월드컵 조별리그, 8강전 주심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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