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아르헨티나와 축구
지난 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농업 대국이자 세계 10대 경제 강국이었다. 한반도 면적의 2배가 넘는 비옥한 곡창 팜파스에서 대두와 옥수수를 재배해 수출했다. 소가 사람보다 많아 가난해도 소고기만큼은 배불리 먹었다. 이탈리아 소년 마르코가 아르헨티나에 돈 벌러 간 엄마를 찾아 떠나는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나왔다. 남미의 스위스라 부르던 시절이었다.
▶나라 이름에도 풍요가 깃들어 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어 은(銀)을 뜻하는 아르겐툼(argentum)에서 비롯됐다. 풍부한 광물 자원 덕에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스페인어 ‘라 플라타(La Plata·은)’라 부르다가 독립 후 지금 이름을 택했다. 이젠 옛날얘기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40년간 국가 부도를 9번 겪었고 올해 10번째 국가 부도 위기를 맞고 있다. 지금까지 IMF에서 받은 구제금융만 20번이 넘는다. 경제학자들은 이 나라를 초(超)인플레이션과 외환 위기가 반복되는 파탄 국가로 규정한다. 자원에 기대어 복지를 남발하고 미래 산업을 키우지 않은 탓이 컸다.
▶올해 물가 상승률이 90%를 넘은 이 나라에서 가장 무의미한 것이 내일을 위한 저축이고, 돈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은 오늘 다 써버리는 것이라고 한다. 정치 불신도 극에 달해 대통령 지지율이 7.9%에 불과하다. 다만, ‘축구에 진심’이다. 내일이 없는 국민은 축구장에서 오늘을 즐긴다. 최고 인기 클럽인 CA 보카 주니어스와 CA 리버 플레이트 간 경기가 열리면 전쟁터가 따로 없다. 흥분하면 공포탄까지 쏘아 댄다. 축구 선수는 이 나라의 세계 수출 1위 품목이다. 피파(FIFA) 랭킹 1위 브라질보다도 많이 내보낸다.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이 카타르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조성한 오벨리스크 광장엔 수십 만 인파가 쏟아져 나와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그 행복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알 수 없다. 월드컵에서 처음 우승한 1978년에도 아르헨티나 경제는 곤두박질쳤다. 그해 물가가 170% 넘게 뛰었다.
▶메시는 대회에 나가면서 “지금 아르헨티나가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다. 국민이 축구라도 보면서 위안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끝내 이 약속을 지켜냈다. 월드컵 결승전을 지켜본 세계도 아르헨티나 축구의 높은 경지와 그들의 헌신에 감탄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좋은 공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36년 만의 월드컵 우승으로 들이켠 좋은 공기가 나라 곳곳으로 번져나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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